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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배

종교칼럼

장자’에 나오는 빈배 이야기다.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반대방향에서 배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부는 상대가 이쪽을 보고 노를 저으리라 여기고 자기 일에만 집중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불행히도 두 배는 크게 충돌하고 말았다. 상대방의 배도 부서지고 어부의 배도 많이 다쳤다. 화가 잔뜩 난 어부가 한바탕 따지려고 고개를 들어보니 이게 웬 일인가! 상대 배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너 눈을 어디 두고 다니냐, 누가 잘했네 못했네, 물어내라’ 하며 큰 싸움이 났을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몇날 몇일 잠도 못 이루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것이다. 온 가족과 친척들을 끌어들여 싸움을 키우고, 그래도 뜻대로 풀리지 않을땐 법정으로까지 갈수도 있다. 때론 그 일로 인해 상대방이나 자신이 억울하여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단지 그것이 빈배였기 때문에’ 사공은 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부주의로 충돌을 일으킨 것을 부끄러워하며 빈배를 보고 허허 웃어 넘길 뿐이었다. 배는 몇푼을 들여 수리하면 된다. 그 일은 그저 그것으로 끝이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 ‘생각의 장난’이 일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정한다. 빈배를 향해 욕하거나 주먹을 휘두르지 않듯, 상대를 빈배라고 여기면 어떤 관계도 쉽게 풀린다. 실제로 모든 존재는 근본이 텅 빈 空한 상태다. 모든 것이 비어있음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확실히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나타난 것들은 몇몇 요소들(지수화풍)이 잠시 모였다가 시기가 지나면 분해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여기 냉장고에서 꺼낸 얼음 한 조각이 있다. 우리는 ‘얼음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분명한 존재’인 얼음조각을 따뜻한 방바닥에 놓고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그 ‘실재적 존재’라고 믿었던 얼음은 눈 앞에서 사라져 비존재가 되었다. 내가 있다고 믿었던 그 얼음은 정말 존재하는 것이었을까?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혹은 어떤 조건을 만나면 텅빈 상태가 되어버린다. 엄청난 고온에 넣고 끓이면 ‘모든 존재’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실 모든 존재는 본래 텅 비어있다는 것이 진리다. 우리 눈에는 엄연한 존재이지만 본질은 비존재다. 空한 것이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의 본질이 공함을 알면 집착이나 괴로울 일이 없다. 허공이 허공과 부딪칠 수 없는 일이다. 텅빈 존재가 텅빈 존재를 접하는데 온갖 잡음이 일어나는 이유는 나와 상대가 굳건히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통은 내 관념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것이다. 텅 빈 존재는 결코 텅빈 존재를 괴롭게 할 수 없다!

상대가 내 마음에 거슬리는 어떤 언행을 했더라도 그 행위자도 그 일도 공한 것이며 빈배이다. 기분나쁠 일도 욕할 대상도 없다. 화를 내야 할 대상이 실상은 텅 빈 것임을, 허상임을 순간순간 알아차린다면, 사공없는 빈배로 여길수만 있다면 머리아픈 세상살이 얼마나 가벼워질꼬!

장오성 교무 원불교 송도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