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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종교칼럼

칠십대 초중반의 사내들 넷이 모이니 차 안이 시끌벅적했다. 모처럼의 나들이가 흥겨웠기 때문일까. 평소에 과묵하던 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다. 비슷한 또래가 모이니 자연스레 대화의 태반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는 데 할애되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해방 전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숨가쁘게 살아가는 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유년시절이 호출되자, 마치 잿더미 속에서 불씨를 찾아내듯이 그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난하고 힘겨웠던 시기였지만 그리움으로 상기되니 정채(精彩)를 띠게 되었다.

누가 오정포(午正砲, 낮 열 두 시를 알리기 위해 쏘던 포)를 쏘던 장소를 떠올리면, 다른 이는 그 옆에 있던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에 편입된 군부대 막사를 떠올리고. 누가 효창공원으로 피난을 갔던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이는 B29 폭격기가 용산역을 폭격해 객차가 하늘로 떠오르던 이야기로 받고, 언덕 꼭대기에서부터 비닐 포대를 타고 눈길을 재우쳐 내리닫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사람이 재강(술찌끼)을 먹고 취해 비틀거렸던 경험을 이야기하면 다른 이들은 녹두국물을 얻어먹곤 했던 어느 공장을 떠올렸다. 녹두국물 이야기는 다꽝(단무지) 공장 이야기로, 원효로와 청파동 일대에 흩어져 있던 철공장들로, 더 나아가 청파동에 유명했다는 미나리 밭으로 확산됐다. 그들이 호출해 낸 유년 시절의 기억들은 그들의 고단한 삶을 비추어 준 찬란한 별자리들이었을 것이다.

몇 해 전 사회학자인 한 벗과 더불어 파리의 거리를 며칠 동안 원없이 걸어본 적이 있다. 돌아서는 골목마다 이야기가 배어 있었다. 유명한 화가나 예술가들이 살던 집, 유명한 작가들이 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던 장소들, 파리 코뮌의 마지막 격전지, 바스티유 감옥, 아프리카와 아랍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벨빌 언덕,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가 살던 집, 헤밍웨이가 머물던 집, 자코메티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걷곤 하던 골목…. 파리가 아름다운 것은 샹젤리제 거리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가 살아있는 도시이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이야기가 배어 있는 공간은 대개 곡선이다.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도시도 사람들이 이야기가 굽이굽이 이어질 때 자연스럽다. 하지만 개발 혹은 발전이라는 명분하에 도시는 직선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야기가 깃들 여백 혹은 그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리 호이나키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세 가지 소외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몸으로부터의 소외이다. 도시인들은 몸을 써서 할 줄 아는 일이 거의 없다. 모든 것을 버튼과 키보드가 해결해주지 않던가. 몸은 정신의 연장(延長)이라는 데 몸을 쓸 줄 모른다는 것과 정신의 빈곤은 묘하게 얽혀있다 할 수 있다. 둘째는 장소로부터의 소외이다. 도시인들은 지역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렵다. 공유지를 가꾸고 돌보는 것은 오직 행정기관의 책임으로 여기기에 주민들은 불편한 일이 생기면 민원을 넣어 해결할 뿐 스스로 그 문제를 풀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시로부터의 소외이다. 분주한 현대인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도 시를 쓰는 사람은 늘었지만 시를 읽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분주함에 쫓기는 이들은 시를 위해 내줄 시간이 없다. 그러나 시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나와 다른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 하나를 잃는 것이다. 시는 다른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이다. 그 창을 닫는 순간 세계는 급속히 좁아지고, 사람들은 자아의 감옥에 갇힌 수인이 되고 만다.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 또한 사람을 만든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사느냐가 한 존재의 태도와 지향을 결정하는 법이다. 사람은 자기들이 들은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자기를 동일시해가며 자아를 형성한다. 브로노 베텔하임은 “어린이가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은 ‘착한 사람이 될까?’가 아니라 ‘누구처럼 될까?’”라고 말한다. 모든 가치가 경제로 환원되는 세상은 이야기가 머물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 삶의 입각점 또한 사라진다. 칠십 대 남성들의 수다가 유쾌하게 들렸던 것은 그들의 이야기 속에 지금의 내 모습이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마다 자기 인생의 저자라는 데 오늘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일까?

김기석 목사 /청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