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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우리를 살게 한다

종교칼럼

모처럼 가족들이 모여도 할 말이 별로 없다.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관심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의례적인 안부를 묻고는 입을 꾹 다문다. 그러다가 누구 입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는 돌연 활기를 띤다. 대개 실수담이지만 지나간 일이기에 다들 유쾌하게 그날을 떠올린다. 당사자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 다른 이들이 소상히 기억하는 경우도 있고, 서로 상충되는 기억도 있다.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보면 사건의 전말이 재구성된다. 그런 이야기 속을 헤매다 보면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가족이란 핏줄을 나눈 사람이기도 하지만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게 과거는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언제라도 돌아가 쉴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드는 이야기들은 인생의 내용이 된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author)이다. 어떤 이는 그래서 ‘원본’으로 태어나 ‘복사본’으로 살아가는 것을 타락이라 일렀다.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고 있는 어른들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 청하면 별다른 게 없다고 눙치기도 하지만, 일단 말문이 열리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질 때가 많다. 특별하지는 않아도 당사자에게는 기가 막힌 세월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무가치한 이야기는 없는 법이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담론들이 세상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희망의 언어보다는 절망의 언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삶의 희망을 구성할 근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탓이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취약한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의 퇴보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삶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은 세파에 간혹 흔들리기는 할지언정 뿌리 뽑힌 채 드러눕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홀로 만들 수 없다. 이야기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關係) 속에서 빚어진다. ‘관(關)’은 문짓장을 지른 모습을 그린 것이고 ‘계(係)’는 ‘걸리다’, ‘잇다’는 뜻이다. 관계란 닫아 걸기도 하고 잇기도 하며 형성된다. 모든 관계 속에는 어떠한 형태든지 간에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연초에 이시영 시인의 ‘아르갈의 향기’를 읽었다. 아르갈은 몽골말로 소똥을 이르는 말이다. 그곳에서는 소똥도 소중한 연료이다. “저녁 무렵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려온 몽골 소년들은 어머니 겔에서 피어오르는 이 연기를 보고 지극한 평화를 느낀다고 한다.” 게르 위로 피어오르는 아르갈의 연기야말로 일상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인 것일까? 시인은 그 시집을 통해 곤고했던 시절을 함께 겪어냈던 길벗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억압적인 권력에 의해 사람들의 자유가 속절없이 유린당하던 시대에 그 강고한 체제에 틈을 만들고, 그 체제를 웃음거리로 만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호쾌하고 장대한 기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의 시 속에 초대된 인물들은 저마다 아픔을 겪어낸 이들이기도 하다.

궁핍한 시절에 어렵게 살고 있는 후배들을 살뜰하게 살피는 선배 문인들의 이야기며, 아버지의 필체를 흉내내 “급전이 필요하니 豚兒 편에 金二百    을 꼭 보내” 달라는 메시지를 들고 잡지사를 찾았던 어느 시인의 중학생 아들 이야기며, 다방 화장실에서 자기 바지를 끌어내리고 커다란 뱀의 혀가 훑고 지나간 것 같은 고문 자국을 보이며 “이 형 내가 민주인사야 뭐야?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맞아야 하지?” 하며 눈물을 흘리던 시인 이야기하며, 무엇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이들이 겪어내야 했던 궁핍과 고통이 그립다는 말이 아니라, 벗들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부둥켜 안고 어찌하든지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려고 마음 쓰던 사람들이 그립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리움이야말로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사회학자는 유동적인 근대의 풍경을 ‘연결되어 있거나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삶’으로 요약한 바 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갈망하면서도 헛헛한 마음을 채우지 못해 바장이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과시적 소비, 주의 끌기, 자기 노출은 우리 속에 있는 근원적인 그리움의 대용물이 될 수 없다. 함께 겪어낸 시간에 대한 공유된 기억만이 그리움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우리들의 시린 마음을 덮어주는 따스한 이불이다. 오늘 그대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또한 벗들과 더불어 어떤 이야기를 써가고 있는가? 더불어 나눌 삶의 이야기가 있는 한 우리들은 빈곤하지 않다.


김기석 목사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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