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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블랙박스

종교칼럼

대형 선박이나 비행기에만 다는줄 알았던 블랙박스를 요즘은 차량에도 많이들 붙이고 다닙니다. 블랙박스는 정해진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정보들을 녹음 녹화하여 저장합니다. 그 덕에 억울한 뺑소니를 당할 일이 확 줄었지요. 사고 나면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던 이야기가 옛말이 되어갑니다. 그래서인지 도로에서 손가락질하며 싸우는 풍경도 사라졌습니다. 꼼짝못할 증거가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지요.   

블랙박스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성능이 좋아야 합니다. 화소가 떨어져 가해 차량번호나 관련된 사람들의 특징을 분별할수 없다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블랙박스도 촬영 범주가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각지대도 있고, 촬영 범주 밖에서 돌멩이 같은 것이 날아와 차에 손상을 입힌다면 그 또한 무용지물입니다. 

이런 한계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최고성능의 완벽한 블랙박스를 소개합니다. 성능도 촬영범주도 완벽하고,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저장하고 기록하는 블랙박스! 그것은 바로 텅빈 허공입니다. 허공은 완벽한 블랙박스입니다. 나와 너의 모든 것을 한순간도 쉼없이 한 티끌도 빠짐없이 저장합니다. 혼자서 했던 일체의 행동은 물론, 순간순간 마음 먹은것, 생각한것, 감정들 하나하나까지 털끝만큼도 오류없이 저장합니다. 저 사람의 마음과 행동 역시 허공은 확실하게 기록합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허공이라는 블랙박스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성능과 무제한의 범주와 방전의 우려가 없는 허공 블랙박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허공 블랙박스는 저장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오고간 일체의 행위와 마음들을 재조합하고 판결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저장된 내용을 재조합하여 내보낸 결과물이 오늘날 내 자신의 모습이며 내 주변의 인연들이며 내가 접하는 일체 상황들입니다. 이전에 행했던 너와 나의 모든 것이 저장되어, 그 결과대로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만나 또다시 새로운 내용을 저장하면서 허공 블랙박스는 끝없이 정확히 무심히 돌아갑니다. 그런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한다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몰랐다고 봐주지도 않습니다. 알든 모르든 행한 것은 시일의 장단이 있을뿐 그대로 재결합되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우주의 철칙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내 마음을, 나의 선행을 몰라준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를 탓할 일도 없습니다. 이미 저장된대로 돌아오는 것들을 다 편안히 수용하면서 이제부터 잘 저장하며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내게 잘못하는 사람에게도 잘 해주면 언젠간 그대로 돌아올 것이고, 마음으로라도 좋은 기운을 보내면 언젠간 다 알게 되어있습니다.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 하나까지도 살피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허공 블랙박스의 존재와 성능을 온전히 믿으며, 마음의 행방을 유심히 살피고, 기회 닿는대로 베풀면서, 누구와도 막힘없이 살면 그 사람의 앞날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다 알아주는, 오류없는 허공 블랙박스가 있어 참 안심이죠. 지금까지는 그 존재를 모른 채 수동적으로 저장되어졌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주체적으로 저장할 차례입니다!

장오성 교무 원불교 송도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