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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여,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라!!"

본지· 대여치 공동기획-대한민국에서 여성 치의로 살아간다는 것 ④ 마지막회-좌담회

적잖이 당황했다. 기자는 좌담회라는 무대에 오른 배우들이 고통에 빠져,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대사를 뱉어주길 고대했다. 그러나 여배우들은 “대한민국에서 여성 치과의사로 사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다”는 독백 대신에 한입으로 “나는 여성 치과의사로 사는 것이(혹은 살아온 것이) 너무나 즐겁다”는 인생찬가를 불렀다. 그리하여 애초에 머릿속으로 그렸던 이 좌담회의 페이소스(Pathos · 비극)는 철저히 실패했다. 본 좌담회는 기획 시리즈에 앞서 강남구 모처에서 사전 진행(2월 5일)됐다.

치과 틀에 갇히지 말고 사회에 영향 미쳐야
자기 일에 집중하는 모습 그것이 육아더라


# 성별의 틀 낡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왜 아직도 낡은 틀로 남성, 여성을 구분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옛날에야 여성 치과의사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힘든 점이 많았지만, 이제는 여성 대통령을 배출할 만큼 발전했는데 이 취지가 온당한지 모르겠다.”

좌담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순희 원장의 일침이 꽂혔다. 장 원장의 말은 이랬다. “내가 치과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여자는 나 혼자였다. 성적이 월등해도 많은 불이익이 있었고, 개원하고도 ‘여자한테 어떻게 입을 벌려’라면서 무시하기 일쑤였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오히려 환자들이 여성 치과의사를 더 신뢰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도 비슷했다. 정유란 원장은 “치과의사라는 직종 자체가 여성성, 양성성을 발현하기 적합하게 디자인된 것 같다. 우리에게는 섬세한 손재주와 환자와 공감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박지연 원장도 “여성이라서 수행하기 어려운 점이 전혀 없다. 오히려 즐기고 있다”고 보탰다.

그럼에도 ‘육아’와 ‘교육’의 문제는 여성 치과의사들에게 큰 도전이 아니냐고 물었다. 김미경 단장이 공감했다. 김 단장은 “개원하고 하루에 30명 꼴로 정신없이 환자를 보면서 출산까지 했다. 육아는 보모에게 맡겼었는데, 큰애가 유치원 다닐 때 선생님과 상담을 하다가 충격을 받았다. 집에만 있어서 사회성이 크게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황에서 치과를 접고, 아이 둘을 키우면서 집에서 10년을 보냈다”고 말했다.

홍성옥 교수 역시 “30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집안에서 출산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런데 현장을 비우면 누군가는 그걸 메워야 하는 구조이고, 그것에 대한 눈총이 은연중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암묵적인 얘기지만 여성 교수에 대한 문호도 제한돼 있어 여러모로 출산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 얘기했다.

사용자의 위치에 서면 결혼, 육아, 출산에 대한 풍경 또한 달라진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김미경 단장은 “출산으로 대거 공백이 생겨 면접을 보게 됐는데, 후보자들의 결혼, 임신 가능성을 스스로 따지고 있더라. 겪어 본 여자가 이런데, 남성들은 오죽할까 싶었다”고 말했다. 

# 언제든 복귀 ‘면허 전문직종의 위엄’

맏언니의 충고는 따뜻했지만, 결이 꼿꼿했다. 장순희 원장은 “출산, 육아에 직면하면 누구나 치과의사와 엄마의 길을 두고 고민한다. 그러나 결과론이지만 ‘애 옆에 있었다고 과연 좋았을까?’라고 물어보면, 반드시 그렇진 않을 것”이라며 “치과의료란 굉장한 집중력과 끈기를 요하는 행위라 흐름을 잡아야 환자를 성심성의껏 케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일찌감치 ‘나의 길을 가련다’라고 선언하고, 치과와 육아를 병행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자기 일에 열심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화를 받는다. 그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박지연 원장도 “요새 많은 선배 분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육아, 교육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는데, 결론은 이랬다. 인위적으로 많은 것을 하려고 들지 마라. 아이는 엄마가 일에 집중하고 잘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대로 배워간다”고 말했다.

장 원장은 흐름을 얘기했지만, 흐름과 관계없이 복귀가 가능한 ‘면허 전문직’의 상찬도 이어졌다. 2009년 서울시장애인치과병원 공공의료단장으로 일터에 복귀한 김미경 단장은 “아이 친구들 모두 명문대 졸업에 대기업을 다니면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육아 때문에 그만두고 나왔는데, 나는 쉴만큼 쉬고도 버젓이 복귀를 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부러워한다. 이것이 면허 전문직종의 위엄”이라고 말했다.

장순희 원장도 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아 온 70대 환자가 찾아와 가슴을 치더라. 선생님은 아직까지 가운을 입고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내 인생은 도대체 뭐냐면서…”.

# 우리는 통섭해서 conduct하는 존재

보수적인 치과계의 풍토를 바꾸기 위해서 여성 치과의사들이 치과라는 틀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회무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양성성을 탑재하면 새로운 발전동력을 얻으리라는 문제의식이다.

박지연 원장은 “이건 개인차가 물론 있겠지만, 회무를 전혀 하시지 않던 여선생님도 회무를 맡기면 완벽하게 수행해 낸다. 순간순간 고도로 집중하는 능력은 확실히 탁월한 것 같다”고 소회를 말했고, 김하나 원장 역시 “동기들을 봐도 확실히 멀티태스커로서 능력들이 뛰어난 것 같다. 하나도 해내기 힘든 일을 동시에 완벽하게 수행한다”고 거들었다. 맏언니 장순희 원장은 좌담회 말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통섭해서 conduct(지휘) 해내는 능력이 있다”면서 “치과의사라는 직종이 다른 쪽으로 뻗어나가기 힘든 직종이라 외골수에 빠지기 쉽지만, 거기에 머물다 보면 나중에 단체활동, 사회활동을 하고 싶어도 끼워주지 않는다. 혼자 머물지 말고 치과라는 알을 깨고 바깥으로 나와라. 그리고 어디든 참여해서 사회에 영향을 미쳐라. 그래야 변할 수 있다.”


좌담회 참석자==========================================

장순희 원장(60대) 
약 40년 경력의 원조 알파걸.
대구→미국→서울의 여정.
 ‘마지막 날까지 진료실에서’

김미경 단장(50대) 
육아와 건강문제로 잘
나가던 치과를 접고, 공공의료에서
인생 2막을 열었다.
 ‘나는 알파걸은 아니야’

박지연 원장(40대) 
예과 때 출산, 본과 때 육아.
늦깎이 개원의.
‘삶과 강하게 맞서는 것을 선택하라’

정유란 원장(30대) 
치과에 터를 두고,
그림책 작가 활동.
고양이 애호가.
‘치과 밖의 길을 찾고 있다’

홍성옥 교수(30대) 
아직도 꿈이 많은 30대
중반의 임상교수.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김하나 원장(30대) 
갓 출산 후 일터로 복귀.
‘몸은 고되지만,
딸을 보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