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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곡

Relay Essay 제2141번째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가셨다.  
                              

3.8선 이북 강원도 평강에서 먼저 월남 하신 아버지를 따라 어린 오빠 하나는 이북에 두고 한 오빠는 업고 다른 오빠는 걸려서 한탄강을 건너오신 어머니께서는 6·25 전쟁 때 맞은 총탄을 무릎에 간직하신 채 그렇게 가셨다.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살림을 일구시며  힘들다는 말씀 한마디도 없이 우리 사남매를 열심히 키우셨다.

부모님의 뜻에 의해 아버지 얼굴 한 번도 못 보시고 어린 나이에 학업도 중단하고 결혼하신 탓에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학구열은 대단하셨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원효로 1가 였는데 오빠들 모두 집에서 먼 광화문 수송초등학교에 다니게 하셨고, 나 또한  당시 새로 설립된 사립 상명초등학교에 입학시키셨다. 자모회장은 늘 맡아서 많은 봉사를 하셨으며 자식들도 근면과 성실과 봉사정신을 본받게 하셨다.

나의 도시락은 항상 9첩 반상이었으며 어린이잡지 표지모델 촬영 시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맘에 들지 않으신다며 촬영을 중단시키고 그 당시 명동 미도파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다 입히신 일화는 이제까지 선명하다. 내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예약은 도맡아 다 해주시고 심지어 병원까지 먼저 줄서시고 계시면 나는 전혀 기다리지 않고 그냥 진료만 받고 오면 되었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세 오빠를 위한 헌신과 노력은 늘 어머니의 즐거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식을 존중하시고 이해 해주신 덕에 큰 오빠는 그때만 해도 해외유학이 어려웠던 1968년에 유학을 가셨으며 삼촌은 그보다 먼저 1960년에 벌써 유학을 보내셨을 정도로 학문에 대한 발전의 길을 열어 주셨다. 나는 비교적 독립적으로 자랐는데 늘 내가 결정하게 해주시고 그 결정을 항상 옳다고 받아주셨다.

아버지 믿고 홀로 월남하신 탓에 주변에 친인척은 한 분도 안계셨다. 이제와 생각하니 살아오시면서 ‘그 외로움과 어려움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하는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애잔히 다가온다.

어머니의 가장 큰 고민은 안면경련이셨다. 아마도 큰살림을 힘드신 내색도 없이 혼자 감당하시며 살아오신 흔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어머니께서 본인의 안면경련이 혹시나 딸자식 결혼 시 방해 되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 하셨는데 어느 날 정형외과에서 신경수술을 받으시고 말끔히 나으셨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의료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터라 백분의 일 성공률에 생명에도 지장을 줄 수 있는 큰 신경수술을 감행하신 어머니께서는 딸자식을 위해 생명을 맡기신 것이었다. 어머니의 살아오신 흔적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내가 아무리 내 자식에게 잘 한다 해도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못 미친다.

아버지께서 11년 전 먼저 작고하신 후 어머니께서는 늘 아버지 사진을 식탁에 걸어놓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대화하며 식사를 하셨는데 어머니께서도 고관절 골절로 수술을 받으신 후에는 자식들 집과 말년에는 요양센터에서 쓸쓸히 지내셨다. 요양센터에서도 어머니에게는 늘 자식 식사와 건강 걱정이 우선이었으며 그 중에도 나의 치과가 잘 운영되는지 늘 걱정해주셨다.

언제나 나의 편에서 나의 의견이 옳다고 해 주신 어머니. 어머니의 이러한 믿음 덕분에 나는 모든 결정을 더욱 신중하게 내릴 수 있었고 책임감 있게 생활해야 함을 배웠다. 어머니께서는 많이 배우지도 못하셨고 많은 경제적 능력이 없으셨음에도 늘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셨다. 먼저 다가가셨으며 먼저 베푸셨으며 먼저 포용해주셨고 작은 일에도 늘 기뻐하시고 감사하셨다. 음식 손맛 또한 뛰어나셔서 나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어머니의 음식 맛에 감탄을 하고 그리워했다.

어머니의 많은 추억을 어찌 다 표현하고 모두 간직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힘든 일과 상황을 직면할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늘 생각하게 되고 그 지혜를 배우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딸로 많은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셨고 늘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해주셨고 가시는 날까지도 나의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셨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함께 하게 해주셨다. 나에겐 늘 고마운 어머니의 그 사랑을 간직하며 주신 사랑을 베풀며 사랑하는 방법을 더욱 배우려 한다.

어려운 시절을 힘들게 살다 가셨으나 주신 그 사랑의 소중함과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오늘도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김경선 한도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