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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옷을 꺼내며

시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상이변이라고 할 정도로 길었던 더위와 열대야 때문에 조금 있으면 쌀쌀해진다는 기상청의 예보는 언제부터인가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가 되어버린 탓에 이번 예보 역시 오보일 거라고 무시하고 넘겼던 참인데, 비가 오고 찬바람이 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20도 아래로 기온이 뚝하고 떨어졌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별생각 없이 반팔차림을 하고 아침 출근 길에 올랐던 저는 추위에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저처럼 여름 옷을 입고 비바람을 피해 웅크린 사람들 사이에 가을 옷을 챙겨 입은 준비성 좋은 분들도 보였습니다. 여름이 가면 날이 추워지는 이런 당연한 것 조차 제 때에 준비를 하지 못하는 제가 멍청하게 느껴졌습니다.

주식, 부동산, 입시, 경제 등 관심사는 다르지만 저희는 항상 앞날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야 오늘 아침처럼 반팔차림으로 떨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고 정보에 밝은 주변사람들 얘기도 듣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준비된 미래를 맞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몇 달 뒤에 제 치과 옆에 대형 치과가 들어올지 어쩔지 알 수 없고 다음주에는 직원들이 다같이 손잡고 퇴사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내일은 치료한 이가 아프다는 환자가 와서 한바탕 곤욕을 치를 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저희를 힘들게 하는 일들은 예상을 하고 있다고 해도 항상 예상하지 못하는 시점에 찾아와 저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정으로 겁나는 것은 저런 사소한 문제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문제라면,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기온이 떨어지듯이 서서히 찾아오는 혹한에 버금가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소나기 같은 문제들은 우산을 쓰고 기다리면 어느 샌가 지나가지만 계절의 변화 같은 커다란 흐름은 작은 치과 원장의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딱히 피할 수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최근 치과계에 호재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보도가 있었습니다. 치과의 보톡스 치료 합헌 판결이 있었고 이어서 레이저를 이용한 피부치료도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호재에 치과계가 들뜬 사이에 1인1개소 위헌 주장, 치과대학 추가 설립 요구, 의료 민영화 문제가 은근슬쩍 기어 나오고 있습니다. 과거 실패에서 배운 것이 있는지 이번에는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크고 작은 흐름들이 지금 당장 저의 치과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올라가는 온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죽고 마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하루하루 악화되어 가는 개원상황에 무관심하고 게으르게 적응해 가다가 결국 서서히 고사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생깁니다.

행복은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있는 순간보다 여행을 기다리는 날들이 더 설레고 즐거운 것처럼 희망이 없는 현재는 아무리 따뜻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치과대학생 후배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너무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슬픕니다. 한번쯤은 허황된 꿈을 꿔봐야 하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개원은 고사하고 취직마저 걱정하는 희망 없는 모습을 보면 마음도 아픕니다. 지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생 후배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장미빛 청사진을 보여주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가을로 가는 계절의 흐름을 바꿀 수 없듯이 현재의 치과계 상황을 바꾸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혹시나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또는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The One’처럼 치과계에도 남다른 능력의 구세주가 나타나 저희를 끌고 구원의 땅 ‘Zion’으로 데려가 주기를 꿈꿔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강희 연세해담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