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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위약(僞藥)’이 되자

Relay Essay 제2155번째

내게 아침의 첫 시작은 늘 시원한 물 한잔이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인가 아침의 첫 시작은 커피가 되어 있다. 내게 커피란 정말 잠이 쏟아질 때, 밥을 굶어 허기질 때 임시방편으로 당을 보충하는 일종의 보충 식품 중의 하나였는데 어느 사이엔가 손에 늘 달고 다니는 음료가 되었다. 오후 3시 이후에 커피 한잔을 마실라치면 밤새 눈만 껌벅껌벅하며 두근두근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었는데, 이제는 손에서 내려놓기 어려운 내 중요 음료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커피를 즐겨 먹다 보면 커피에 대해 많이 알고 관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몇 년을 물보다 많이 마시면서도 실은 커피에 대해 그 어떤 지식도 없다. 아직도 커피를 구입하러 가면 한참을 메뉴판 앞에 서서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어떤 커피는 너무 달고 어떤 커피는 너무 진하고 어떤 커피는 커피 맛이 너무 약하고, 망설이다 결국은 이도 저도 선택을 못하고 그냥 기본인 아메리카노를  선택하고 만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내가 특별히 원두에 일가견이 있어 그러리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실은 난 커피에 대해서 그냥 마시는 것 외에는 관심조차도 없다. 원두의 원산지에 따른 맛의 비교도 못하고 그 차이도 모르니 실은 그냥 커피라면 굳이 가리지 않고 마신다. 그냥 편하고 간단한 것을 그리고 가장 빠른 기본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어느 날 늘 그렇듯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들고 책상에 앉아 밀린 일을 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무슨 맛으로 마셔?” 그 질문에 잠깐 생각에 잠긴다. 그래~ 난 무슨 맛으로 커피를 즐기는 걸까? 한참을 커피잔을 바라보면서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그냥 쓰던데… 엄마가 마시는 커피는! 엄마는 설탕도 안 넣고 우유도 안 넣고? 그럼 맛 없지 않아?”

커피가 맛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지금도 커피 맛은 모르기도 하고. 아이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기다, 내가 커피를 즐겨 찾는 이유를 찾았다. 내게 커피는 위로, 믿음, 각성을 할 수 있는 위약(僞藥)이다. 물론 실제로 커피의 성분 자체가 몸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내겐 철저히 심리적인 음료가 된 지 오래인 듯하다. 커피 한잔이 주는 효과가 때론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불러내는 걸 보면 말이다.

아이에게 엄마에게 커피가 주는 여러 가지 영향을 설명하니, 아이의 대답이 기분을 좋게 한다. “정말? 나한텐 그럼 엄마가 커피네~~ㅎㅎ” 짧은 아이의 대답 속에 커피보다 더 진한 효과가 나타난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에게 아직은 답답한 엄마, 고리타분한 엄마가 아니라 위로가 되기도 하고 믿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영향력을 주고 있다니 말이다.


아이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18년 정도 병원에 근무하면서 많은 내방객들을 만났다. 물론 그 중 대다수는 우리가 환자라고 부르는 고객이다. 하루에 평균 30~35명씩 18년을 만났으니 참 많은 환자들을 만난 셈이다. 그 환자들 중에 참 힘들었던 환자가 한 명 있었다. 재수를 하고 있는 키도 덩치도 꽤 큰 남학생이다. 첫 만남부터 눈도 마주쳐 주지 않고 그 어떤 질문에도 “네, 아니오” 말고는 다른 단어를 들을 수 없는 학생이어서 나름 의료서비스를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내게 그 학생의 반응과 관계는 늘 숙제였다. 매번 만날 때 마다 새로운 인사법부터 시작해서 진료설명, 구강관리 교육 등의 임상적인 내용, 또래 문화에서 친숙한 게임 용어까지 익혀서 대화를 시도했지만 부단히도 애를 쓰는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 한결같은 반응 없음으로 허무한 물거품으로 끝나는 상황을 만들던 학생이다.

그런데 진료가 마무리가 되어가던 어느 날 그 남학생이 건넨 방울토마토 몇 알. “제가 직접 키운 거예요. 오늘 아침에 실장님 드리려고 땄어요. 늘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눈도 잘 맞추지 않고 늘 짤막한 대답이 전부였던 내 목소리만 들리면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던 그 남학생이 토마토를 건네준 그날 아침 길지 않은 두어 문장이 내겐 그날 그 어떤 자극제보다 강렬했다. 대답 없는 메아리에 드디어 이른 아침 빈속에 마시는 커피보다 더 진한 피드백으로 돌아온 것이다.


요즘 우리는 의료 서비스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여러 가지 접근 방식으로 배우고 실천하고 가르치고 공유하고 있다. 잘 하고 있는 곳을 따라 하기도 하고 우리만의 차별화된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모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핵심은 뭘까? 의료 서비스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한 것 같다.

내가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느끼는 커피의 위력처럼 나를 그렇게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 그들의 위약(僞藥)이 되자. 때로는 나로 인해 위로가 되고 때로는 나로 인해 병원에 대한 믿음을 주고 때로는 나로 인해 특별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게….

 장효숙 서울시치과위생사회 공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