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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Relay Essay 제2168번째

3년 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을 앞두고 치과의사 국가고시 준비를 위해 정독실 죽돌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나. 매일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정독실에 눌러앉은 지 벌써 1달이 지났다. ‘오전수업→정독실→점심식사→정독실→저녁식사→정독실→침대’의 반복되는 일상들. 물론 중간중간의 휴식타임도 포함되어있다. 정독실에 막상 책은 펼쳐놓고 있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런 저런 생각들만 머릿속을 맴돈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울려 퍼지는 몇 년 전 노래가사들에 지난날의 기억들이 떠오르고, 이어지는 상념들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핸드폰을 한번 들면 기본 30분. 이런 저런 뉴스 기사 가십거리 등등을 보거나 친구들에게 쓸데없는 안부를 묻는다. 그러던 와중에 예전에 즐겨봤던 만화 ‘슬램덩크’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학창시절을 함께 해주었고, 내가 힘들 때마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친구이자 동반자 같은 만화.

이 만화를 모르는 20~30대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명장면들과 명언을 쏟아낸, 풍요 속 빈곤으로 언급되는 요즘 만화와는 차원이 다른 명작 중의 명작. 불량청소년인 주인공 강백호가 농구를 좋아하는 히로인 채소연에게 반해, 순전히 여주인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 농구에 입문하여 ‘바스켓 맨’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전형적인 청춘만화에 불과하지만 묘하게도 난 이 만화에 끌렸었다. 불순한 의도로 농구를 시작한 불량청년이 원래 의도와는 달리 정말 농구를 사랑하게 되는 반전 때문일까?

설레는 마음을 한가득 품에 안고 만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에피소드. 농구 초보 강백호의 ‘북산’과 고교 최강 ‘산왕공고’의 경기. 스토리의 마지막 즈음에 강백호는 볼을 살리기 위해 몸을 날리게 되고, 그 결과 심각한 등 부상을 입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앞으로 농구를 못하게 될지 모르는 강백호를 선수교체하려고 하는 안 감독님에게 강백호는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여주인공 채소연에게로 다가간다. 언제나 채소연 앞에서는 수줍어하던 강백호는 갑자기 상남자로 빙의하여 채소연의 어깨를 덥석 잡고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그리고 코트로 돌아간 강백호는 마지막 역전 슛을 넣고 팀을 승리로 이끈다.

단순히 채소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 농구를 시작한 덩크밖에 할 줄 모르던 풋내기 강백호가 어느덧 농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채소연에게 진실한 마음을 고백한다. 물론 다른 감동적인 요소들도 많이 있지만 난 특히나 강백호가 채소연에게 했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목적어가 빠진 중의적 의미의 문장이다. 처음 채소연에게 치근댈 때의 단순한 엔조이 감정이 아닌 정말 채소연을 좋아한다는 고백인지, 아니면 채소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처음엔 농구를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했었는데 정말 농구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고백인지, 아니면 둘 다 해당하는지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강백호의 진심어린 고백방법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재지 않고 자신의 진실 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돌이켜보면 난 그동안 얼굴에 가면을 쓰고 살아온 것 같다. 내 진실된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길 꺼려했고, 내 속마음을 남들에게 들키는 게 싫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확실한 의사표현 대신 항상 애매모호하게 감정을 표현했던 것 같다. 어쩌면 요즘 같이 흉흉한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강백호의 마지막 고백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시험기간, 매일 늦은 밤까지 이어진 임상전단계실습, 정신없이 보낸 원내생 생활 등등. 매 순간이 힘들고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라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다.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주변 환경을 미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좋은 척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강백호처럼 나도 이젠 정말로 치의학을, 모교를, 교수님들과 선후배 동기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비록 난 강백호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좋아한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국시 공부하기 바쁘니까.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소심하게나마 내 진심을 전하고 싶다.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하성호  부산대치전원 4학년 총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