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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을 저들에게 알리지 말라?

Relay Essay 제2191번째

새해 들어 가장 먼저 본 연극이 ‘전화벨이 울린다’란 작품이다.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친절과 웃음을 노동의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감정 노동자인 콜센터 상담원들의 이야기다. 전화 상담원 수진은 고객에게 표현해야 하는 감정과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 사이의 간극, 즉 감정 부조화 때문에 괴로워한다.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유능한 선배 지은의 말을 듣고, 연극 배우 민규에게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고객이 원하는 감정을 자신이 실제처럼 느끼고 ‘연기’하려는 노력이다. 수진은 연기 수업을 통해 가면 쓰는 법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아간다.

‘연기’와 ‘감정 노동’, 두 단어가 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두 번의 개원을 경험하면서 스트레스를 이겨낼 돌파구로 찾았던 것이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경영과 소신 진료 사이의 갈등으로 혼란스럽던 첫 개원 때 처음 덴탈씨어터(연극을 사랑하는 치과인 모임)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혼란을 극복 못하고 치과를 접으면서 덴탈씨어터와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2년 조금 넘게 쉬는 동안 뉴질랜드의 한 작은 도시에서 여러 달을 머물렀다. 현지인들과의 교류가 조금씩 생기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치과의사라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안 사람들은 신뢰감을 표하고 좀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나라에서는 아직 치과의사가 존경 받는 직업으로 여기지는 것 같았다.

그들의 호의가 도움이 된 건지 망각의 힘 덕분인지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 듯이 벗어버린 치과의사란 옷을 다시 입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시간이 지나고 치과에만 들어서면 날카롭고 예민해지던 때에 다시 덴탈씨어터를 만났다. 연기를 익히고 연극을 보러 다니고 연기와 관련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답답했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개원을 하기 전에 어느 원로 선생님께서, 치과의사는 사람의 아픔을 고쳐주는 좋은 일도 하면서 돈도 잘 버는 축복 받은 직업인 것 같다는 취지의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막상 개원의 현실에선 치과의사는 치료비만 비싸게 받는 믿을 수 없는 사람처럼 여겨질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숨기고 환자가 원하는 대로 내키지 않지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감정의 부조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치과의사로서의 자부심은 상처 받고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자 열려 있던 마음은 서서히 닫혀간다.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에서 수진은 연기 수업을 통해 일에 대한 자신감은 커졌지만, 카페 종업원에게 서비스가 잘못 됐다고 날카롭게 따지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한편 진상 고객에게 공중전화를 걸어 폭언을 한 지은은 회사의 압박을 받다가 결국 비극적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연극에서는 ‘개인의 내면 깊은 곳까지 상품화의 촉수가 뻗친 자본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존재론적 고통’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의 음습함에 노출 되었던 오이디푸스의 존재론적 고통’과 나란히 놓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치과 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치과의사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선입견을 주고 싶지 않아서라고 얘기했지만, 치과의사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으로부터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자부심보다 더 크기 때문은 아닐까?
한 편의 연극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감정 노동, 연기, 오이디푸스 사이에 놓인 가교 / ‘전화벨이 울린다’ 드라마터그의 글 / 이양구

허경기 조은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