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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욜로족 라이프, 와인

Relay Essay 제2195번째

개업하고 아주 빠른 시기에 병원이 잘 됐습니다.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였죠. 이때도 물론 열심히 와인을 구입하고 마시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병원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성형외과의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동종 치과의 견제도 있었지만 그런 건 성형외과와 비교도 안 되는 수준 이었구요. 조금씩 환자가 줄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성형외과 분위기도 안 좋아지면서 전체적인 양악 경기도 안 좋아지게 되었죠. 심지어는 몇 달간 집에 생활비를 못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와인은 열심히 마셨습니다. 아주 몰상식한 가장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랐죠. 이마저도 하지 못하면 더 큰 불화가 닥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직장에서도 스트레스, 집에서도 스트레스. 이 것을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한다면 환자를 볼 때도, 집에서도 모두 좋지 않은 형태로 분출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마음 고생하는 저를 위해서도 뭔가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와 아내, 다른 가족을 위한 선물 말고 저 자신을 위한 선물.

병원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집에서 짜증을 내거나 직원들에게 잔소리 하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더 맛있는 와인과 음식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 한 해 맛난 와인을 많이 찾은 걸 보면 스트레스가 무척 많았던 듯합니다. 하하하!

지금까지 만났던 와인 중 가장 감동적인 와인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도멘 르로이(Domaine Leroy) 1971년 빈티지입니다. 밭 이름은 기억을 못합니다<사진1>.

맛이 훌륭하지도 상태가 좋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나이를 먹은 와인이었습니다. 소위 ‘탄생빈’이라 불리는 와인. 무려 40여년을 어딘가에서 굴러다니다 이제는 화려한 모습은 간데없고 사그라져가는 모습으로 만나게 된 와인. 가슴 뭉클 했습니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탄생빈을 찾는구나 싶었습니다.

그 후로 아이들의 탄생빈, 아내의 탄생빈 와인을 각각 한 병씩 구입해 지금까지 보관해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나 아내가 먹게 될지 제가 먹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나는 와인은 와인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정말 접해보고 싶은 와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보르도 와인의 제왕이라 불리는 샤또 페트루스.(Chateau Petrus)<사진2>.

그런데 와인가격이 워낙 고가여서 차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얄팍한 보너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페이닥터 시절이었는데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으나 아내가 모르는 돈이 생긴 거죠. 샤또 페트루스를 하나 사고 싶은데 돈은 한참 부족하고 고민을 하던 중 보험을 해약했습니다. 종신보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돈으로 주저 없이 샤또 페트루스 2008 빈티지를 구입했습니다. 한 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와인의 시음적기는 제가 환갑이 넘었을 때더군요. 하하하!

집안 족보도 잘 모르는데 와인메이커 족보를 외우기도 하고 읽을 줄도 모르는 프랑스어 사전을 찾기도 하고 와인에 숨겨진 얘기들을 듣기도 합니다. 아직도 맛있는 와인을 먹게 되는 날이면 몇 시간 전부터 설레기도 합니다.

40대 남자 가장은 반드시 건전한 취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그래서 힘이 나는 내 자신의 취미.

언젠가 김어준 씨가 20대에 배낭여행을 하다가 돈을 몽땅 털어 명품 양복을 사 입었단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진정 힘들 때, 진정 돌아보고 다독거려야할 사람은 가족, 친구, 연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정지웅 다카포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