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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업에서의 상식과 법 그리고 정의에 대한 단상(斷想)

Relay Essay 제2196번째

2010년 경 하버드 로스쿨 교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원제 : JUSTICE)”를 통해 우리 사회에 정의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적이 있다. Justice의 어원은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저울은 개인간의 권리 관계에 대한 다툼을 공평하게 판단하는 것을, 칼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자에 대하여 국가권력이 제재를 가하는 것을, 눈을 안대로 가린 것은 사심 없이 공평한 자세를 갖는 것을 각 의미한다.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이후 페이닥터도 해보았고, 치과대학 동기들이 개업해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변호사로서 유스티치아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 보니 문득 ‘방패는 어디있지?’, ‘안대는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수사기관이 특정 개인의 문제점을 일일이 파헤치고 칼을 들이대기 시작하면, 적절하게 방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업을 하면서 상식에 근거해서 결정한 수많은 행위들을 수사기관이 의심의 시각을 갖고 현미경처럼 일일이 들여다보고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미시적 판단을 내린 후 유스티치아의 칼을 휘두른다면 모르긴 몰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범죄의 경중을 떠나서 범죄 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법적인 문제를 겪는 분들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본인의 상식대로 일을 하다가 사기나 횡령으로 기소되는 경우가 실제로 허다하다.

비즈니스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는 소위 상관습(商慣習)이라는 것이 있는데, 상관습은 상법 제1조에서 “상사에 관하여 본법에 규정이 없으면 상관습법에 의하고 상관습법이 없으면 민법의 규정에 의한다”고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또한 민법 제106조에서는 “법령 중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관계없는 규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에 당사자의 의사가 명확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관습에 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쉽게 설명하면 당사자의 의사가 명확하지 아니한 때에는 관행이나 관습을 참고해서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형법과 상법 및 민법이 서로 다른 규제영역을 갖고 있지만, 형법상 행위자가 행위 당시에 범죄의사를 갖고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해당 업계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상관습을 참고하여야 한다. 그런데 법관이 그 상관습을 모르고, 변호인이 상관습이 어떻다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판결이 내려질 것이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깔끔하게 suit를 입은 기업변호사가 멋있어 보여서 기업관련 일을 해오고 있지만,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동지애 때문인지 어려움에 처한 의료인들을 보면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고는 한다. 얼마 전에도 힘든 처지에 있는 의사 선생님을 도와주기 위해 형사재판 변호를 맡았었다. 병원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남들도 하는 관행대로 여러 결정을 내리고 진행한 것들이 문제가 되어 여러 가지 혐의로 수사가 시작되어 결국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고 말았다. 의료업을 해본 경험이 있었던 나의 관점에서는 무죄로 보였고, 재판과정에서도 일관되게 무죄변론을 하였는데 아쉬움이 남는 판결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만약 검사가 의사 출신이었다면 아예 기소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판사가 의사 출신이었다면 의료업의 상관행을 이해하고 있어서 무죄 판결이 충분히 나올 수도 있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의료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있어서는 오히려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의 안대를 풀어주고, 의료 현장을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또한 국가기관이 함부로 휘두르는 칼에 의료인이 다치지 않도록 의료인들에게 방패를 쥐어 주는 것이 정의의 여신이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수사가 종료되어 기소된 이후에는 수사내용을 뒤집거나 수사절차의 위법을 시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우리 형사 재판실정을 감안할 때 수사단계에서부터 방패가 필요하다.

그리고 의료업이 다른 업종에 비하여 더 많은 규제 하에 있고, 환자들이 진료에 불만을 품고 온갖 트집을 잡아서 행정청이나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을 의료인 스스로 인지하여야 하고, 병원을 경영하고 환자를 진료하면서 본인의 상식에 근거해서 내리는 수많은 결정들이 지금이라도 법에 위반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점검하여야 한다. 이 점검은 정기적으로 행해져야 하고 이러한 점검을 통해 본인의 상식과 법을 일치시켜 나가야만 눈을 가린 유스티치아가 휘두르는 칼로부터 본인을 구할 수 있다.

김용범 변호사·치과의사(오킴스법률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