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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곳에 가느냐 묻는다면

Relay Essay 제2198번째

한 노숙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치아가 한 개도 없었지만 웃는 모습이 정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기증받은 빵 가운데 부드러운 부분만 골라 가져다주면 어찌나 고마워했는지 모릅니다. 낮에는 노숙인 상담소 근처를 서성였는데, 믹스 커피 한잔을 타다 건네면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갓 대학생이 된 햇병아리 상담원의 인사를 처음으로 밝게 받아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와의 첫인사에 무슨 말을 했었나 정확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의 환한 미소가 잊히지 않습니다.

유난히도 춥던 어느 겨울날, 그는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상담원의 걱정에 감기가 걸렸다고 답하곤 힘없이 몸을 뉘었습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그는 음수대 근처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행려자로 분류되어 일정 행정 절차를 거친 뒤 무연고 화장 처리되었습니다.

거리에서 경험한 첫 죽음은,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괴로워할 새도 없이 또 다른 죽음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괴로움은 화로 변했습니다. 신은 이미 화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해서, 그에게 기도할 때면 육두문자가 섞이곤 했습니다. 하루하루 성장하여 6개월쯤 지나면 성인군자가 되어 이곳을 떠날 줄 알았는데, 욕만 잔뜩 늘고 성격도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상상조차 못 해본 경험- 불시에 소주병으로 머리통을 맞는다거나 욕설을 참아내는 일, 꽁꽁 언 뺨을 제대로 맞아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던 때의 그 느낌, 용변으로 뒤범벅된 사람을 데려다가 씻길 때의 그 기분이 앞으로의 인생에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될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거리에 남겨진 사람들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에, 거리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지하도에서 환갑잔치를 벌이고, 시설 입소나 병원 방문에 함께했으며, 정신질환이 악화되어 이름마저 까먹은 지 오래인 사람의 이름을 찾아주는 등 그 삶에 더욱 깊이 관여하면서 그간 알지 못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온종일 고물을 주워 번 돈으로 동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안줏거리를 사는 모습, 물품을 지급받을 때에 약한 사람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는 모습, 때로는 가족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전부일지도 모르는 사소한 일들이 그제서야 아름답게 와 닿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그리도 욕한 신이 바로 이 거리에서, 그들과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엎치락뒤치락 버티는 와중에 치전원에 입학하여, 머리가 점점 커집니다. 논문을 펴놓고 폼도 좀 잡아봅니다. 무거워진 머리를 부여잡고 거리에 나서니 비틀비틀, 갈지자를 걷습니다. ‘우리 얘기는 책 속에 없는데?’ 하고 외치는 것만 같습니다. 공공과 예방의 관점에서 현장을 이해하는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아직도 실마리조차 잡히지가 않습니다. 다만, 부쩍 커지는 머리와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양손 가득 따뜻한 생강차를 들고 거리로 계속 나가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제 거리에서 열 번째 봄을 맞이합니다. 치전원에서도 무사히 진급하여 무려 3학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치과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사람이 거리에서 처음 건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제 이런 곳에는 오지 마.”
그전에도 많은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런 곳에 왜 자꾸 가느냐고. 최근까지도, 치전원에 갔으면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훈계를 들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얼버무렸을 질문이지만, 이제는 떳떳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치전원 학생이니까, 또 예비 의료인으로서 현장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이승현 경희치전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