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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니는 보철이 아니라 패션이다

그림으로 배우는 치과의사학- 4

어떤 침대회사의 광고 카피 문구인데 18세기에 틀니는 진짜 패션이었다. 왜냐하면 틀니는 사람을 만나고 말할 때 만 장착하였고 식사할 때에는 틀니를 빼고 먹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틀니는 패션이 아니라 보철인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있다. 치과에서 보철 치료를 행할 때 보철(補綴)의 어원적 의미도 항상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치과의 꽃길이라고 할 수 있는 ‘보철(補綴)’의 의미를 찾아가 본다.

이한수 선생님의 주장에 의하면 ‘보철’이라는 용어는 19세기말 일본 치과의사들이 미국 볼티모어 치과대학에서 출판한 Mechanical Dentistry(치과 기계학)을 번역하면서 최초로 치의학 서적에 적용되었다. 먼저 보철을 한 글자씩 살펴보면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기울 보(補) : 깁다, 돕다, 꾸미다, 고치다. 엮을 철(綴) : 엮다, 잇다, 연결하다, 짓다. 기울 보(補)는 ‘옷 의’ 변으로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틀니는 패션이란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엮을 철(綴)에서는 ‘또 우(又)’변이 4번이나 반복된다.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이처럼 보철 치료는 무한 반복되는 운명을 갖고 있다. 또 우(又)에는 용서하다와 돕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환자와 술자,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도울 것인가?

보철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한(漢)나라 때 대성이 편찬한 예기(禮記)이며 49편중에서 12편 내칙에 ‘보철’이 나온다. 또한 송(宋)나라 주자는 대성이 편찬한 예기를 인용하면서 소학(小學)에서 보철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치과에서 보철치료는 터진 부모님의 옷을 꿰메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父母唾洟(부모타이)를 不見(불견)하며(부모님의 침과 콧물을 더럽게 보지 아니하며)
冠帶垢(관대구)이면 和灰請漱(화회청수)하고(부모님의 갓과 띠에 때가 묻었으면 잿물을 타서 씻기를 청하고)
衣裳垢(의상구)이면 和灰請澣(화회청한)하며(의상에 때가 있으면 잿물을 타서 빨기를 청하며)
衣裳綻裂(의상탄렬)이면 紉箴請補綴(인잠청보철)이니라(의상이 터지면 바늘에 실을 꿰어 꿰맬 것을 청한다)
小事長(소사장)이나 (젊은이가 연장자를 섬기며)
賤事貴(천사귀)이나 (천한 이가 귀한 이를 섬길 때는)
共帥時(공솔시)니라 (모두 이러한 예절을 따라야 한다)   

토머스 롤런드슨의 그림 ‘Six Stages of Mending a Face(1792)’은 상, 하단 모두 우측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감상해야 한다(그림1). 작품명 하단에 써진 문구 ‘Dedicated with respect to the Right Hon. Lady Archer’가 이채롭다. 번역하면 존경하는 귀족 부인 Archer에게 바친다. 풍자 화가의 그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형적인 반어법이다. 작품의 주인공 Sarah Archer(1741-1801)는 지주의 딸로 태어나 20세에 결혼하였지만 37세에 미망인이 되었고 그 시절 영국에서 악평이 자자한 부인이었다. 그녀는 ‘가든파티’라는 명목 하에 상류층 인사를 초대하여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는 명민한 여성 사업가였다. 특히 영국 왕세자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기에 그녀의 사업은 탄탄대로였고 그녀는 풍자의 단골 인물이었다.

첫 번째 그림은 처진 가슴에 치아는 없고 외눈박이 노파를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치과에서 유일한 치료가 발치인 것처럼 안과에서도 적출이 일반적인 치료였나 보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의안을 착용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대머리 상태인 못생긴 노파가 곱슬머리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 이 시기에  대머리는 탈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머리 염색을 시도하다 재앙을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Archer 역시 젊게 보이려는 허영심에 들떠 무리한 염색으로 인해 모든 머리카락이 소실되지 않았나 싶다.

네 번째 그림은 Archer가 거울을 보면서 낑낑대며 틀니를 장착하고 있다.(그림)

 18세기에 틀니 장착이 어려웠던 이유는 상악과 하악 틀니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스프링이 있었기 때문이다. Pierre Fauchard는 최초로 스프링을 이용하여 상악 틀니가 탈락되는 것을 방지하였지만 입을 다물기 위해서 다소 근육을 긴장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했다. Arthur Lufkin은 ‘History of Dentistry(1938)’에서 영국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하였던 프랑스 앙리 3세가 틀니 끼우는 광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인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왕의 수염을 붙잡고 하악을 잡아당기면 왕은 그 사이에 작은 병을 열고 뼈로 만든 틀니를 꺼내 장착하였다.”

다섯 번째 그림은 토끼의 발을 도구삼아 진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예뻐지게 위해 화장을 하고는 있는데 엽기적이다. 서양에서는 행운의 부적으로 토끼의 왼쪽 뒷발을 가지고 다녔다고 하기에 어쩌면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18세기에 화장은 상류층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고 역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었다. 또한 화장품에 포함된 고농도의 납 성분 때문에 화장품도 허영을 위해 사용된 위험한 물건이었다. 드디어 변신 과정을 거쳐서 20대 여성의 모습으로 마지막 그림에서 완성된다.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후 가면을 들고 있다. 가든파티에서 하는 가장무도회에 참석하려는 것을 암시한다.

20세 소녀로 변장한 50대 여성은 입을 헤벌레 벌리고 멍청한 미소를 지으면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있다.(그림) 18세기에 전치부가 보이는 스마일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18세기에 설탕이 대중화되면서 충치는 모든 계층에서 호발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구강위생 상태가 가장 심각하였다. 반면 치의학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였기에 충치 치료법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1789년 이후 슈망의 도자기 틀니가 등장하면서 초상화에서도 피아노 건반 같은 치아를 노출시키는 기법이 시도되었다. 치의학의 발전이 미술사에도 영향을 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 틀니는 허영심을 위한 사치품, 가장 깊숙이 간직하고 싶은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또한 틀니는 위험한 물건이기에 음식을 씹는 것은 상상불가였고, 그 시절 남자 가발처럼 자연스러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니의 비용은 엄청났다. 상아 틀니(ivory teeth)는 25기니(Guinea) 현재 가격으로 125만원, 도자니 틀니(porcelain teeth)는 80기니 지금은 400만원이나 되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탈 때 필자의 눈에 비친 임플란트 69만원은 폐업을 앞둔 가게에 걸린 프랑의 문구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동물의 뼈로 만든 틀니가 사람의 턱뼈에 이식된 임플란트보다 더 뛰어난 치료란 말인가? 지하철에 적혀진 치과 치료 수가를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보면 생각도 많아지고 가슴도 답답해진다. 하루빨리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질 바란다.


권 훈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미래아동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
2540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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