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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서의 학창 시절

Relay Essay 제2205 제2206번째

나는 따뜻한 남쪽 부산에서 수련생활을 하고 있는 전공의이다. 고향이 부산이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는 강원도 소재의 유일한 치과대학, 강릉원주대학교 치과대학이다. 우리나라 지도의 저 먼 아래쪽 끝 부산에서 20년간 살아온 나에게 강원도는 실로 미지의 땅이었다. 사실 면접을 볼 때만 해도 그냥 여행 삼아 가 보자는 생각으로 갔는데, 어쩌다 보니 합격을 하게 되었고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하여 이곳 강원도에서 길고도 짧은 6년간의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굉장히 낯설었다. 날짜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개강 첫날인 3월 초였을 것이다. 대운동장에서 입학식을 하는데, 어느 순간 스르르 눈발이 날리더니 30분도 안 되어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이는 것이었다. 눈이 잘 오지도 않을뿐더러, 눈이 내리더라도 가루처럼 풀풀 날리면서 땅에 닿자마자 녹는 장면만 익숙하게 봐 왔던 나에게 이는 실로 충격적인 경험이었기에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이때까지 지내왔던 따뜻한 나라와는 정말로 다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눈 얘기를 할 것이 참 많다. 학교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태백산맥 줄기의 정상 근처에는 5월까지도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만년설’이라고 불렀다. 기숙사에서 식당을 오가는 길에 동기들끼리 그 만년설을 보고는 저건 도대체 언제 녹냐면서, 안 녹는 것 아니냐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곤 했는데 다행히(?) 6월에는 볼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새벽부터 폭설이 내려 교내를 비롯한 도시 전체가 엄청난 양의 눈으로 뒤덮인 적이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눈의 양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그날 오전에 해가 뜨니 학교 내의 차도 및 인도가 차와 사람이 얼마든지 통행할 수 있도록 아주 말끔하게 제설이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고향 부산에서 2~3cm 정도의 눈만 와도 교통이 마비되는 모습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다시금 충격을 금치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듣기로는 강원도청, 강릉시청 등의 공공기관에 제설작업과 관련하여 해외 각 기관에서 연수를 오기도 한다고 한다.

입학 후 초반에는 주말이 되면 친구들이 많이 서울에 가거나, 집인 부산을 자주 오갔다. 특히 집이 서울이었던 동기들은 실로 매주 금요일 오후만 되면 터미널로 향해 서울로 갔다가, 일요일 밤에, 심지어 아침 첫 수업이 늦는 날이면 월요일 오전에 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집인 부산을 가려면 서울보다도 거의 두 배 이상의 비용 및 시간이 소요되기에 매주 가지는 못했지만, 아무 연고도 없고 낯선 환경에서 주말을 보내기 싫은 마음에 생각보다 자주 집에든 다른 지역에든 다녀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동기들이 하나둘씩 차가 생기면서, 점점 타 지역에 가는 것보다 주말을 강원도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선배님들이 자가용을 많이들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대학생들이 무슨 차가 이렇게 많냐면서 굳이 학생 신분에 사치스럽게 차를 사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만 지내보니 대중교통이 뜸한 지역 특성상 자가용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운신의 폭에 있어 하늘과 땅 차이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차주가 된 동기들이 늘어나면서 시간이 나면 바닷가에 커피 한 잔을 하러 가거나, 근처의 명소에 바람을 쐬러 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강릉을 커피의 도시라고 하는데, 실제로 한적한 곳에 호젓하게 위치한, 개성있는 카페가 많이 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카페에 들어가 앉아 푸른 바다와 반짝이는 모래를 보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실로 엄청난 행복이었다. 미스테리했던 점은, 카페들이 없어지지는 않으면서 생기기는 꾸준히 계속 생긴다는 점이었는데, 요새는 어떤지 궁금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치과병원 원내생으로서 실습을 하고 있던 본과 3학년 가을, 문득 올해가 강원도를 즐길 수 있는 마지막 가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 4학년 가을이 되면, 국가고시 준비를 하느라 가까이에 널려 있는 천혜의 자연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에, 그리고 졸업하고 나면 다시 강원도를 찾아오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거의 매주 산으로 단풍놀이를 갔던 기억이 난다. 동기들끼리, 동아리에서, 멀리 고향에서 오랜만에 올라오신 부모님과도,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이곳저곳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대한민국 명승지 제1호인 오대산 소금강에서 옥수수 막걸리의 시원하고도 달콤한 맛에 반해버린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글을 쓰다 보니 언제 또 맛볼 수 있을지 참으로 그립다.

지금은 공사를 새로 싹 했다고 하는 설악산 울산바위 지옥의 철계단을 기숙사 동기들과 같이 올랐던 것도 기억이 난다. 정상에서 땀에 온몸이 젖은 초췌한 몰골로도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성악가처럼 노래를 하던 동기 형의 모습이 생생하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는 우리를 스쳐 반대로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측은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난다.

진료봉사 동아리 후배들과 형형색색의 단풍이 뒤덮인 오대산 정상에 오른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산이 좋아지면 나이가 드는 것이라는 말을 얼핏 스쳐들은 것 같은데, 되돌아보니 우린 20대의 나이에 이처럼 자발적으로 등산을 하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을 가까이 접하면서 나는 점점 도시의 번잡함이 싫어지고, 여유로운 교외를 좋아하게 되었다. 본과 4학년 때는 오랜만에 서울에 갈 일이 있었는데, 버스 종착지인 동서울터미널 근처에 접어들면서 도로에 온갖 차량과 사람이 뒤엉킨 모습을 보고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불편한 기분에, 스스로도 ‘아, 내가 어느새 시골 사람이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본과 4학년 초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병원이 휴진을 하게 되면서, 나를 포함한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급 소집되어 강원도 삼척 소재의 환선굴 탐방을 갔던 일, 원내생 시절 1월 1일 새해 꼭두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정동진 해돋이를 보러 갔다가 모래사장 전체를 뒤덮은 엄청난 인파에 깜짝 놀란 일, 당시 나의 발이 되어 주었던 95년식 구아방으로 험준한 고갯길을 오르다가 차가 퍼져서 포기한 일 등등, 강원도에서 보낸 6년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많은 추억이 있었다.

학교 생활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추억이 많고 재미있었다. 우리 학번은 참 단합이 잘 되었다고 자부하는데, 공부를 잘 하는 우등생 친구들이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을 부처님과 같은 자비로움으로 이끌어 주었으며, 임원진을 맡은 총대단 형들은 수고로운 일들을 자청하며 진심으로 학번 전체를 위해 헌신하였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리 학번 학생들 모두 단체를 위한 규칙을 잘 따르고 지켰으며, 독도는 물론 우리 땅이지만 우리는 한 번의 시험을 치더라도 독도 꼴찌를 근절하고자 학번 차원에서 굉장히 노력하였던 기억도 난다. 쪽지시험에서 구강 작열감 증후군(burning mouth syndrome)의 mouth를 mouse라고 적어내면서 순식간에 죄 없는 쥐를 불태워 버린 동기도 있었으며, 초진 차팅을 너무 열심히 하려던 나머지 구강검진을 원해서 온 환자에게, 구강검진을 받고 싶은 생각이 언제부터 들었는지, 구강검진을 받고 싶은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는지를 물어보았던 동기도 있었다. 지금은 그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국민의 구강보건 향상에 이바지하고 있다. 우리는 한 학번이 40명이 채 되지 않아 다들 서로 가까이 지냈는데, 각자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모난 데 없이 다들 잘 어울려서, 힘든 일도 다같이 즐겁게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본과 4학년 후반이 되어, 치과의사 국가시험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잘 쳐야 하는 시험이 아니고, 나 스스로만 잘 치면 되는 시험인데도, 인생 최대의 위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게 공부했다. 공부 내용이 어려웠다기보다는, 남들은 다 합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혹시나 내가 탈락하지는 않을지, 실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시험이 임박해 올수록 더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부모님 댁을 방문하면 그때 우리 아들 인생 최대의 위기 아니었냐고 하시며 웃으면서 예전 얘기를 하시곤 한다. 다행히 운 좋게 합격하고 무사히 졸업해서 지금은 다시 고향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는 가족들과 친구들도 자주 볼 수 있고, 본래 쓰던 말투로 어색하지 않게 환자들에게 말도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며, 좀더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등등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강원도에서 동기들과 동고동락하며 즐겁게 보낸, 마음만 먹으면 경포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던 학창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다.

강원도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통해, 번잡한 도시보다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곳을 더 좋아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 굉장한 행복이며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단순히 자연 환경이 빼어난 것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교수님들과 언제 보아도 편하고 든든한 동기들,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는 동문 선후배들을 만난 것도 내 복이다.

바쁘고 멀다는 핑계로 학교에 자주 찾아가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도 많지만, 지금도 지역민의 구강건강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계실 우리 강릉원주대학교 치과대학 교수님들과 17기 동기들, 선후배님들 모두 자랑스럽다고 전하고 싶다. 다음에 찾아가게 되면 그간 못 했던 옥수수 막걸리를 오랜만에 꼭 한 잔 마시고 싶다.

김윤호 부산대치과병원 구강악안면외과 전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