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나이가 들다보니…

Relay Essay 제2207번째

작년에 환갑이 지났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어서는 생각지도 않게 좋은 점들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이가 들다보니, 기억력이 떨어져 가슴에 대못이 박혔던 그 쓰디쓴 고통조차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더 편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어귀가 마음에 절절이 와 닿는다. 쇠락해져가는 기억력을 한탄하며 가슴 아파 한 적도 있었으니 이제는 기억이 안 나면 필요 없는 것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만다. 내게 나쁜 짓하고, 못된 짓 하고, 가슴에 상처를 준 사람들조차도 잊혀져 오히려 편하다.

나이가 들다보니, 술이 약해졌다. 취한 후 기분에 술집 바꿔 가며 밤새 마셨던 술이건만, 요즈음은 취하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돌아다닐 기분도 나지 않아 빨리 집으로 갈 생각만 한다. 술을 마시면 다음날 일하는게 너무 힘들다는 것이 머릿속에 각인되어서 취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이기심이 발동한다. 다음날 술이 깬다해도 그 후유증이 사흘은 간다. 정신집중이 안되어 일이 힘들어지다 보니 술 생각이 자꾸 사라진다. 남들이 일생 마실 술을 40대까지 이미 다 마셔버린 듯하고, 담배도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하루에 두 세갑 피워댔고 남들이 일생 피울 정량을 다 채웠으니 술, 담배 안해도 여한이 없다.
 
나이가 들다보니, 긴 산행이 망설여진다. 옛날엔 서울근교의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쉬지 않고 일주하는 불수사도북종주, 지리산종주, 설악산의 공룡능선종주 같은 엄청난 체력소모 산행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섰다. 이제는 이처럼 산행시간이 긴 산행지는 몸을 사리고, 땀이 많은 체질이라 산속에서 길을 잃으면 저체온증으로 그냥 골로 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나이가 들다보니, 열정이 현저하게 식었다. 젊어서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옛날에 비해 경제적인 여유는 있지만 의욕이 사라져 하지 않게 되는 일이 자꾸 늘어간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젊은 날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대문호들과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나이가 들다보니,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 의식이 옅어진다. 잘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는 소식을 들으면 죽음의 문턱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더욱 새삼 느끼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내 몸 어느 구석에선가 목숨을 재촉하는 질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검사받기가 두렵다. 오래 살기위해 약에 매달려 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탐하지 않으며 나름대로 운동하며 조심해서 살면 그만이다.
 
나이가 들다보니,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도,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여분의 돈을 가지고 있다 한들 뭔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오래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은 신선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나중에 쓰려고 지금의 나이에도 저축을 하는 것은 싱싱한 먹거리를 나중에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지금이 때깔과 맛이 최고로 좋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머뭇거리지 않으며 살려고 한다. 미래를 위해 아끼며 살 나이는 지났음을 절감한다.

나이가 들다보니, 젊은 날부터 이를 악물며 혼자의 힘으로 실현하려 했던 꿈은 그런대로 이룬 듯하다. 앞으로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 해도 쉽게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고의 틀을 바꾸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면 내가 몰랐던 다른 세상이 또 다시 나타난다. 경직된 사고의 틀을 바꾸려면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독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다보니, 혹독한 시련과 고통도 천둥을 동반한 거센 비바람처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잦아든다는 것을 절실히 깨우치게 되었다. 밤하늘의 밝은 달과, 별을 헤아리며 다가섰던 많던 꿈이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지금 처해진 상황에 만족해야 여생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다보니, 상대방을 배려해야 내가 대접받는 일이 더 많아짐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이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기 바라기 보다는 내가 먼저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다보니, 공수래공수거를 실천하신 아버지 때문에 흙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았다. 빛나는 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좋은 수저를 만들 수 있는 아주 좋은 토양에서 자랐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형제들은 거의 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 사회각계 각층에서 최고의 지위에 까지 이른 훌륭한 분들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다보니, 추구하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해져 남과 비교하는 일이 적어지다보니 마음이 평안하다. 어려운 도전이 찾아오면 맞서 싸우기 보다는 피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나이가 들다보니, 취미로 시작한 플루트를 연습해도 늘지 않는다. 내가 우두머리로 있는 밀레니엄 플루트 오케스트라가 아마추어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여 올해 3월 18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의 10회 정기연주회도 성공리에 끝났다. 플루트 연주 기량이 늘지 않더라도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숙명이 되어 버렸다. 한동안 백두대간 종주에 미쳐있었다. 얼마 전 백두대간 종주기 책이 출간되었다. 전국 명산에 피어있는 진달래, 철쭉의 향연을 보러가야 할 새봄이다.

류호성 수원 웅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