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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춘성(花爛春盛) 그리고 김밥예찬

Relay Essay 제2210번째

어느덧 인생의 초가을쯤,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나. 

화사한 봄 햇살같이 나에게도 봄이라 불릴만한 시기가 있었다. 사촌들까지 오빠만 9명인 딸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친척들과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라며 부러울 것 없이 유년시절을 보내온 나는 어릴 적 엄마, 아빠가 만들어 주셨던 김밥이 그리도 맛있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갈라치면 왜 꼭 비가 왔을까. 소풍 때면 아빠와 엄마는 새벽부터 뽀얀 흰 쌀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어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참기름과 씹을 때마다 톡톡 터지는 깨소금을 듬뿍 넣고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고 맛있게 비벼내셨다.

까만 김 위에 양념한 밥 한 덩이를 척 얹어 두툼하게 썬 단무지, 소시지, 달걀, 오이.

사실 오이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가끔 다투셨다. 엄마는 시금치가 쉬면 탈난다고 오이를 넣자고 주장하셨고, 아빠는 맛이 떨어지니까 그래도 시금치를 고집하셨다. 아마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 탈나는 게, 맛없게 김밥을 먹는 게 싫었던 두 분의 다르지만, 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 시절에 귀했던 쇠고기는 미리 정육점에서 김밥에 넣기 좋게 썰어서 준비를 하셨다.

그 시절에는 게맛살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우엉을 넣어주신 적도 있었고, 당근을 넣어주신 적도 있었지만 우엉과 당근은 싫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김밥은 언제나 쇠고기 김밥.

김밥은 항상 아빠가 말아주셨다. 출근하기도 바쁘셨을 텐데 평소 음식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아빠는 엄마가 김밥을 말다가 형태가 다소 틀어지는 모습을 많이 보아온 지라 정성 들여 김밥 재료를 준비한 엄마를 밀치고 까칠한 셰프인 양 김밥을 마셨다.

아마 그 시절 다른 집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김밥을 말아서 한 줄 통째로 내 손에 쥐어주시는 아빠. 난 새벽이라 다 떠지지도 않은 눈을 비비며 그 김밥을 받아들고 커다랗게 한입 베어 물고는 꾸역꾸역 김밥을 맛있게도 먹었다. 어쩜, 아빠는 그리도 굵은 김밥을 자르지도 않고 내 손에 쥐어주셨을까.

난 소풍을 갈 때마다 도시락을 펼치는 점심시간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엄마는 늘 내 도시락과 선생님 도시락을 함께 싸주셨는데 정성 가득 들어간 도시락을 펼치면 친구들은 저마다 “한 개만~”을 외쳤다. 어린 나이였지만 친구들의 그런 반응들이 왜 그리도 좋았는지.

다 나눠주고 정작 나는 먹을 김밥이 없어서 다른 친구들의 김밥을 먹은 적도 많다. 그런 이후로 엄마는 내 도시락을 찬합에 싸주기도 하셨다. 도시락에 나란히 줄을 지어 앉아있는 김밥. 그 위에 간 쇠고기와 깨소금이 뿌려져 있고, 옆에 또 한 도시락에는 제철 과일이 그득했다. 그리고 삶은 달걀과 사이다.

엄마가 어찌나 손이 크셨는지 과일은 다 먹지도 못했다. 가방에서 과일 국물을 흘리고 집으로 오기 일쑤였지만 등이 다 젖어도 난 행복했다.

춘(봄)은 김밥을 떠올리게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아름다운 계절인 봄이야말로 들로 산으로 나들이 가기는 딱 좋으니까.

성인이 돼서도 김밥 사랑은 계속됐다. 좋아하기도 했지만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유치원에 근무했을 당시 소풍은 정말 너무 행복했다. 반 아이들이 점심시간이 돼 모두 펼쳐놓은 도시락들. 정말 나 어릴 적 자랑스러웠던 김밥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멋들어진 김밥들이 많았다. 식상한 동그란 김밥 대신 꽃잎모양의 김밥을 잘라서 꽃을 만들고, 아이들이 먹기 편하게 새끼손가락 굵기로 아주 작게 만든 김밥도 있고, 속 재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해져서 김밥 뷔페가 따로 없었다.

나는 부모님들이 정성 들여 싸 주신 도시락도 있었지만 늘 아이들에게 “OO야, 선생님 김밥 한 개만~”을 외치며 아이들의 김밥을 하나씩 먹어보며 행복해했다. 어릴 적 친구들이 왜 그렇게 ‘한 개만~’을 외쳤는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맛인지 궁금하니까. 반 아이가 20명이라서 하나씩만 먹어도 배가 터질 듯했다.

김밥은 행복 그 자체였다. 시대가 좋아지고 먹거리가 많이 생겼어도 소풍을 가거나 어디 놀러 갈 일들이 있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바로 김밥이다. 각종 속 재료들이 영양균형까지 딱 맞춰놓고 맛도 좋은 김밥. 요즘 김밥을 어디서든 구입할 수 있고 프랜차이즈가 넘쳐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요즘? 요즘은 내가 직접 김밥을 싸먹는다. 입맛도 변해 어릴 적 즐기던 쇠고기 김밥보다는 참치에 마요네즈를 듬뿍 넣어 향 좋은 깻잎과 생 고추냉이를 넣고 함께 또르르 말아서 맛깔나게 먹는다. 김밥 마는 솜씨는 아빠를 닮았나 보다.

꽃이 만발한 한창 때의 어느 봄날. 누구나 좋아하고 질리지 않는, 영양만점의 김밥과 내 삶을 슬쩍 견주어 본다.

이경화 ㈜메디칼유나이티드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