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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은 무단 횡단자들의 천국인가?

시론

1993년 유럽에 처음 갔을 때 비행기가 내린 곳은 히드로 공항이었습니다. 영국을 여행하며 그저 길에 서있는 내 앞을 지나가며 ‘excuse me’라고 낮은 저음으로 말했던 영국신사의 목소리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슈퍼마켓에서 진열대 물건을 보고 있는 내 앞으로 물건을 집으려던 손이 지나갈 때 들리던 ‘excuse me’도 생생합니다. 이래서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 전 출장으로 영국에 다녀왔습니다. 런던에 들어서며 예전의 그 느낌을 기대했지만 23년전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횡단보도 신호를 지키는 영국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얌전히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여행객입니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이미 건너가기 시작하는 것은 양호한 편이고 신호와 무관하게 모두들 무단횡단을 합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그렇게 여러 날 런던에 머무르면서 보고 또 보았지만 무단횡단은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관찰을 하던 몇 일째 저는 또 다른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모든 차량은 신호를 엄격하게 지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건 없건 횡단보도 앞에서는 멈춰섭니다. 정지선 역시 정확하게 지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차량이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고 멈추기까지 하며 건너가는 사람을 인정합니다. 우리나라 같았다면 건너가는 사람 없는 횡단보도라면 초록색 불이 깜박거리기도 전에 차들은 진행을 합니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달려들 것처럼 경적을 울립니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도로에서 보행자는 절대적인 약자입니다. 자동차와의 사고에서는 보행자가 다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자동차는 신호를 엄격히 지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리학에서 말하는 ‘윤리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는 그대로 상대에게 해주라는 의미로 ‘공감’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대칭성 윤리(Symmetrical ethics)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쪽편이 자원이나 지식, 힘 등 여러 가지가 다른 한 편 보다 적은 경우 이러한 대칭성 윤리는 적용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비대칭성 윤리(Asymmetrical ethics)라고 하며 보행자와 자동차가 도로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비대칭성 윤리는 전문가의 직업윤리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됩니다. 질환에 대해, 치료방법에 대해, 사용되는 도구와 재료에 대해 절대적인 약자인 환자를 만나는 의료인은 보다 신중하고 또 배려해야 합니다.

비전문가인 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대해 충분히 알고 사용 가능한 치료에 대해 그 방법과 과정, 장점과 단점, 부작용, 예후 등에 대해 의료인으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들고 치료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환자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결정하도록 도와주는 절차가 바로 치료동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치료동의서(Informed consent)는 이러한 윤리적 비대칭 상황을 해소하는데 매우 중요한 도구입니다.

자신의 질병에 대해 그리고 또 치료방법에 대해 비전문가인 환자는 의료인에게 질문하고 또 설명을 들음으로써 자발적으로 결정하고 치료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단횡단을 하여 길을 건너가는 보행자에게 경적을 울려대듯이 묻고 또 묻는 환자들을 대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치과의사가 어딘가 다른 곳이 불편하여 의사를 만나러 병원에 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모습일까요? 발치하고 임플란트를 심으면 됩니다 라고 너무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니를 빼는 과정 중에 신경손상가능성이 있습니다 라고 통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지선을 지키고 무단 횡단하는 사람에게도 경적을 울리지 않는 그런 윤리적인 의료인이 되기 위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창진 미소를만드는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