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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연의 Dental In-n-Out

老 鋪

拙稿를 들고 매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오후의 따스한 차 한 잔 같은 말벗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더는 바람이 없겠습니다<필자 주>.

사진작가 박관호 원장님이 보내주신 찔레꽃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배경의 맑고 파란 하늘이며 이름 모를 초록빛 들판, 생글거리는 눈망울 같은 하얀 꽃송이들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근심거리 다 뒤로하고 훌쩍 떠나보고 싶지만, 가느다란 한숨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햄릿의 독백처럼 인간의 사고력을 넷으로 나누면 하나가 지혜고 나머지 셋은 두려움인걸까? 늘 주저하며 마음속만 데우고 있는 찔레꽃 처럼 애처로운 내 소망들이여.
 
청계천 공구거리에는 수십 년 간 덧씌운 도로정비로 인해 높아져버린 인도 탓에 정작 상점입구가 50cm는 낮아져서 흡사 반 지하처럼 되어버린 상점들이 있다. 간판도 벽도 몹시 낡고 허름하다. 신호대기하며 애써 안을 들여다보려 해도 어두컴컴한 게 대체 영업을 하는지도 알쏭달쏭한데, 갑자기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며(여닫이 강화유리 도어를 달 수 도 없지요 반지하가 되었으니) 검은 비닐봉지를 든 한 손님이 나온다. 천신만고 끝에 원하던 부속을 구했다는 안도의 기색과, 어두워 얼굴도 제대로 못 본 방금 전 주인과의 만남이 과연 현실 이었던가 긴가민가하는 표정이 뒤섞인 손님의 손에 적군의 깃발이라도 되는 듯 들려있는 저 반짝이는 검은 비닐봉지의 위용. 몇 백 년, 몇 세대를 이어왔다는 일본의 노포들 못지않게 아름답고 향기로웠던 그 장면이 훅 굽이쳐 들어와서는 내 가슴속에 모호한 형체로나마 한 가지 소망으로 자리 잡았다.
미래의 어느 날, 주변의 여러 치과의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반적 재 시술을 권했으나 아무래도 내키지 않노라며 날 찾아와 형용키 어려운 환부를 보여주는 환자에게, 아하 뭐 그러시다면! 하며 쓰윽 내밀어 줄 수 있는 작고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대략 그런.

공 던지고 공 때리는 데 무슨 별다른 작전이 필요하냐는 모 야구감독 이야기처럼 아무런 마케팅도 없이 무념무상으로 환자를 기다리다 딱 필요한 것만 딱 원하는 만큼 치료해주는 시크한 할머니 원장이 과연 될 수 있을까. 병원이 반 지하든 허름하든 상관없이 그런 날의 나라면 틀림없이 아름다울 것이다(메타포입니다, 물론… 짜증 주의)

다만, 경영압박과 인력 조달문제 등등 산적한 난관들이 두려워, 생각만으로도 갑갑해져온다. 노포로 가는 길에는 변화가, 그것도 여러 가지 큰 폭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할 거라는 느낌이다. 내 힘 만으로야 물론 어림도 없겠지만, 마냥 손 놓고 있는 것도 도리는 아니라고 조심스레 생각하고는 있다. 매주 교회를 나가는 건 아니라 해도 기도는 늘 하고 있답니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커트 보니것 <제 5 도살장>중에서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