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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연의 Dental In-n-Out / 眞 珠

기고

“OO에 있다. 몇 시쯤 끝나니?” 아침에 사소한 이유로 다 큰(!) 딸을 꾸짖는 문자폭탄을 날리셨던 엄마로부터 퇴근 무렵 또 날라 온 문자다. 데리러 오라는 말씀. 아직 앙금이 남은 채 도리 없이 가긴 가지만, 조수석에 들어와 앉으신 엄마에게서 살짝 풍기는 익숙한 향수냄새에 어느새 난 묻고 있다. “냉면 드실래요?” 물로 변한 내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종일토록 힘겹게 느릿느릿 흐르다가 저녁 무렵 엄마의 향기라는 절벽에 이르러 물보라를 일으키며 시원한 폭포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라고 한껏 멋을 부려 봤자 어쩌면 엄마보다 나 자신이 더 미웠던 하루의, 그 싱겁기 짝이 없는 결말이 쑥스러워 내미는 변명일 뿐입니다만.

“나는 믿음을 위해 1년간 싸워왔다. 우리가 여기서 이기면 언제까지나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훌륭한 것이며, 그것을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다.” 격렬한 감수성의 마초작가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속 주인공 조든의 독백이다. 대학서 스페인어 강사로 일하던 청년은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1년간 휴가를 얻어가면서 까지 스페인내전에 참전한다. 헤밍웨이도 그 전쟁에 보병대위로 참전했지만 전투 못지않게 투우나 플라멩코에 매료되어 있었고 미모의 종군기자 마사 겔혼과 세 번째 결혼도 했다. 전쟁터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신념으로 고양되어 참전했던 한 청년이 무의미한 작전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어여쁜 19세의 스페인 아가씨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그가 진정으로 말하려던 주제에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의용군 게리 쿠퍼와 게릴라 부대의 순박한 처녀 잉그리드 버그먼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되어버린 영화가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푸른 달빛 가득한 바위틈에서, 코는 어느 쪽으로? 라고 수줍게 묻던 잉그리드 버그먼을 기억하시지요?

2차 대전의 손꼽히는 패전인 말레이전투를 다룬 영국의 정신승리 영화라고 할 만한 <콰이강의 다리>에서는, 포로가 된 영국군 장교가 비인간적이던 일본인 수용소장에게 초인적인 의지로 끝내 양보를 받아내고, 촉박한 기일 내에 다리를 건설해내는 능력을 보일 뿐 아니라, 결국 그 다리를 스스로 폭파하여 눈부신 군인정신을 완성한다. 한 지휘관의 신사적 매력과 명예를 지킬 줄 아는 우아함 등에 멋진 OST까지 덧붙여 수치스런 패배를 가리고 그에 뒤따를 전쟁의 명분 담론을 애써 덮으려는 게 제작의도라는 견해에 나도 한 표.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소설 어딘가에서, 좁은 마당 구석에 푸른 잎이 겨우 몇 장 뿐 인 볼품없는 무화과나무를 두고 “아직 익지 않은 열매가 변명처럼 달려있었다”고 묘사했다. 사랑이나 명예 같은 것들은 막대한 살육과 파괴가 불가피한 전쟁의 합리화라는 초라한 나뭇가지에 매달기엔 지나치게 빛날 뿐 아니라, 구차해도 그냥 믿는 척 해 달라며 내밀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여기서 이기면 언제까지나 이길 수 있을 것이다’란 저 맹목이 동서고금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어딘가로 이끌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더욱 현충일을 정해 애국선열과 장병들의 충절을 추모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최소한의 도리일 것 같고.

더 나은 세상을 꿈꿀 뿐 악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비겁한 거라고 손가락질 한다면 그 비웃음은 감수하겠다. 그렇지만 일상의 평온만이 전부인 거냐는 추궁은 억울하다. 나는 훌륭한 세상을 학수고대 하고 있으며, 다만 사랑과 긍지들을 더욱 소중히 품에 꼭 끌어안고 떼어놓지 않겠노라 다짐 하고 있는 것 뿐이다. 변명의 열매가 아니라 반지에 박힌 진주처럼.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