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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江本色

오지연의 Dental In-n-Out

대단했다는 프랑스 오픈 테니스 여자단식 결승전을 새벽 1시 재방송으로 봤다. 가족들은 모두 잠들고 거실엔 음량을 줄인 채 빛을 내뿜고 있는 TV와 나 단 둘 뿐이다. 밤 비행기라도 탄 것 같은 고적함이 깊고 고요한 대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도 타다가 휘파람도 불다가 정 외로우면 밝은 달을 한번 쳐다본다던 왕유의 시를 불러낸다. 여기가 대숲이라 치고 왕유나 도연명 흉내나 한번 내볼까, 세상사의 모방이지만 훨씬 원칙을 따르고 현실에선 찾기 힘든 정제된 선수들의 자태와 움직임이 있다는 게 스포츠 관람의 매력이니 거문고 연주 못지않은 풍류가 될 수도 있다고 하면 억지일까 등등의 생각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발까지 까딱이며 정작 경기는 반쯤은 건성으로 봤다. 그럼에도 역시 압도적 느낌은 찾아왔다. 마지못한 듯 가느다란 연기를 피우면서도 금세 여름날 대청을 자장가처럼 뒤덮던 모기향처럼.

우승자인 라트비아의 엘레나 오스타펜코는 연못가 바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워터하우스의 그림 속 오필리어를 떠오르게 하는 기다란 붉은 머리를 정수리쯤에서 질끈 묶고 베이스 라인 안쪽으로 2m는 들어간 채 뭔가 계속 중얼거리며 리시브자세 내내 몸을 흔든다. 흘러내린 머리를 매만지고 목걸이에 입을 맞추는 동작이나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은 샤라포바를 연상케 했지만 의외의 괴력을 보여 주었다. 첫 세트를 지고 2세트도 0-3까지 끌려가기에 결과를 모르고 봤다면 그대로 경기가 끝나나보다 했을 정도였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거의 네트에 붙다시피 서서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는 빠른 점핑스매시로 다운 더 라인 공격을 지칠 줄 모르고 계속했는데, 루마니아의 할렙이 좌우 사이드로 헐레벌떡 뛰어다니며 받아넘기려 애썼지만 결국은 지치고 말았다. 물론 범실도 많았다. 포핸드 양손 백핸드 번갈아가며 막무가내로 상대편 라인 쪽으로 냅다 내리꽂는 스트로크다 보니 절반이상이 아웃되는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몇 번 절레절레 흔들며 씩 웃고 만다. 그리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똑같은 공격. 상대 분석이나 방어 따위 아랑곳없이 그저 공이 네트를 넘어오자마자 무조건 공격하는 기계 같았다. 과감한 플레이에 종내 캐스터와 해설자까지 매료되어, 중계할 생각도 잊은 듯 말없이 지켜보다 허허 웃곤 할 뿐이었다. 이번 대회에 불참한 세레나 윌리엄스 특유의 상대의 존재감을 싹 사라지게 하는 가공할 파워가 샤라포바처럼 포토제닉한 스무 살 아가씨에게서 시종일관 솟아 나오고 있었다.

長江의 뒷 물결이 나타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늘 드는 의문인데, 흔히들 말하듯이 과연 앞 물결은 그저 쓸쓸하기만 할까? 독창적으로 보이는 오스타펜코의 플레이였지만 거기엔 샤라포바의 앳되면서도 매서운 파이팅과 윌리엄스의 폭발적 파워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히 담겨있었다. 보이시한 매력과 스피드까지 보강된 진화된 형태의 신예를 통해 여자 테니스라는 강물은 그 도도한 흐름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나를 흉내 냈지만 어딘가 좀 더 훌륭해진 모습으로 뒤따르는 후배를 만난다면 행복하고 자랑스러울 것 같다. 훗날 자신이 기억되려면 어쩌면 이 방법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앞 물결의 서글픔이란 그 어떤 후배에게도 자신의 한 부분을 새겨 넣지 못한 쪽의 때늦은 넋두리는 아닐는지.

대숲 속 달빛이니 뭐니 전부 상상이고 기껏 한밤중 홀로 거실 한 편에 깨어 있는 주제에 長江의 깊숙한 사정을 대체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가령, 홍수로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가는 신세가 될 경우, 공연히 수영 잘 한다고 허우적대다 자칫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말이기보다는 그저 물살에 몸을 맡기고 그 결대로 하구까지 떠내려가 살아남을 작정인 소인지라, 언제나 강의 흐름을 나름대로는 꽤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어서라고 해 두지요. 하하.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