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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江 文學紀行

Relay Essay 제2225, 26, 27번째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군의관을 마치고 처음 치과의원을 개업했던 1986년까지 해외여행이라곤 꿈도 못 꾸었다. 개업 이듬해에 가까웠던 친구부부와 태국 파타야를 다녀온 것이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물론 그 전에 고등학교 수학여행지와 신혼여행지로 일종의 해외(?)인 제주도에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고등학생 때의 제주도 수학여행은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44년 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목포에서 제주를 왕래하던 여객선 ‘가야호’가 제주에서 목포로 돌아오던 중에 기관고장으로 동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추자도 근해였던 것 같다.

 600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을 싣고 배는 정처 없이 섬 사이를 헤집으며 떠 다녔다. 몇 시간을 파도에 흔들리며 떠돌자 모두가 심한 뱃멀미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날이 어두워진 후 출동한 해군함정에 의해 다시 제주항으로 예인된 다음날 새벽녘까지 온통 공포와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아마도 ‘세월호’사건의 전주곡은 아니었나 싶다.

 1987년의 첫 태국 해외여행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남아메리카를 제외하고 세계 곳곳을 두루 다녀왔다. 특히 ‘대한영상치의학회’를 따라 인도와 남아프리카 일대를 여행한 것이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첫 인도 여행에서 얻은 강렬하고도 신비로운 영감은 이듬해에 15일에 걸친 인도전역 가족여행을 강행하게 하는 동기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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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가깝고 학회도 자주 개최되어서 여러 번 다녀왔지만 이번처럼 문학기행을 목적으로 떠난 것은 처음이었다. 상해(上海)에서 중경(重慶)까지 2400Km의 뱃길을 11일간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역사와 문학적 명소 곳곳을 순방하는 크루즈코스는 1년에 한번 뿐이고 우리나라 몫으로는 단 30명만 배정된다. 작년에 시작된 첫 코스에는 연세대 ‘김동길’ 명예교수께서 다녀오셨다고 한다.

 나이어린 시절부터 동경했던 시인,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의 주역 ‘이백’이나 ‘등악양루’의 작가 ‘두보’가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삼국지의 터전인 형주와 적벽일대를 돌아보는 뜻 깊은 여정이다. 그리고 파촉(巴蜀)의 근거지인 중경(重慶)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널려있는 역사적 사적을 일일이 답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여행 첫날 인천공항을 떠나 상해에 도착해서 오후 여섯시 쯤 강물을 거스르며 상류를 향해 출항했다. 상해는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해서 ‘상전벽해’란 대명사답게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강물에 투영되는 화려한 야경을 자랑했다.

 장강(長江)은 일명 양쯔강(陽子江)으로 불리는 총 길이 6200여 km의 기나긴 강이고 지류만 무려 3000여 개에 이르며 중국대륙 어디든 수상운송이 가능하도록 황하의 지류와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장강을 따라 뱃길로 여행하던 11일 동안 거대한 선박들이 마치 바다의 뱃길처럼 수없이 꼬리를 물고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그 엄청난 물동량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장강은 구간에 따라 그 이름도 다양하여 상해부근 1000km 이내에서는 ‘양쯔강’, 그 다음은 ‘심양강’, 형주부근에서는 ‘형강’, 그 상류인 삼협 일대는 ‘천강’, 중경에 이르러서는 ‘금사강’, 그보다 더 상류인 티베트 접경에서는 ‘통천하’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강의 수직적 높이인 낙차는 상해에서 시작하여 장강하류 1000km까지는 약 15m로 완만하지만 호주에서 의창에 이르는 약 1000km의 구간에서는 30m로 높아지다가 장강 발원지인 티베트 고원지대까지 상류 4500km구간은 무려 5800m에 달한다. 직선거리로 치면 상해에서 중경까지 약2400km, 중경에서 히말라야 부근의 고원지대나 티베트 국경까지는 약6000km에 달하는 거리이다.

 드넓은 장강하류를 따라 양주와 남경을 거쳐 이틀을 항해하여 중국불교의 4대 명산인 ‘구화산’에 다다랐다. 이번 문학기행의 첫 주요 방문지인 구화산에는 당나라 시대에 이름을 떨친 지장보살로 99세에 입적하신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기원선사’가 있다.

 구화산은 높이 약 1200m의 불교 성지인데 구불구불한 낭떠러지 길을 따라 한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수많은 사찰과 거대한 금빛 불상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구화산 정상부근에 자리 잡은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김교각 스님은 신라 성덕왕의 장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권다툼에서 분쟁을 겪다가 바로 아래 동생인 ‘중경’에게 태자자리를 물려준 후 중국으로 유학, 절강성과 안휘성에 머무르다 구화산에 입산한 다음 수도에만 전념하여 후에 모두가 숭배하는 등신불이 되었다고 한다.

 구화산을 거쳐 만 하루를 더 상류로 헤쳐 가니 ‘황학루’, ‘악양루’와 함께 중국강남 3대 누각중의 하나인 ‘등왕각(滕王閣)’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등왕각은 당 고조 ‘이연’의 22번째 아들이자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의 아우인 ‘이원영’ 이 그 지역 목사로 봉해져 부임한 후 8층으로 지은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강변 누각이다. 첫 건축 후 29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원영의 후임 목사였던 ‘염백서’가 베푼 연회에 참석한 시인 ‘왕발(王勃)’이 지은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왕발은 수나라 말의 유명한 수학자 ‘왕통’의 손자로써 당나라 초기(初唐) 4걸(傑)이라 불리는 당대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약관 1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산랑(朝散郎)이 되었고, 그 후에 괵주참군(虢州參軍)을 지냈다.

 왕발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참신하고도 건전한 정감을 노래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고 특히 7언절구(七言絶句)에 뛰어났으며 시문집으로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을 남겼다. 그는 불과 26세였던 676년 8월, 교지땅(交趾令)에 좌천된 부친을 찾아가다가 배에서 떨어져 장강에 빠져 죽었다.  여기에서 당시 왕발이 염백서에게 올렸던 ‘등왕각서(滕王閣序)’시 구절의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滕王高閣 臨江渚/ 佩玉鳴鑾 罷歌舞./ 畵棟朝飛 南浦雲/ 朱簾暮捲 西山雨./ 閑雲潭影 日悠悠/ 物換星移 度幾秋./ 閣中帝子 今何在/ 檻外長江 空自流.

등왕각은 강변에 홀로높이 서있고/ 옥패소리 춤 노래 다 사라져 버렸네/ 이침에 구름은 남쪽 지붕에 걸리고/ 저녁에 빗물은 서쪽 주렴을 때리네/ 물 위에 비친 구름 유유히 떠 있지만/ 세월은 흘러가고 만물은 바뀌었네/ 옛 주인 제왕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난간밖엔 장강만 부질없이 흐르네.

 이 시에서 보듯이 왕발은 흐르는 세월의 야속함과 장강의 아름다움을 능숙한 7언절구(七言絶句) 시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등왕각을 지나 장강을 거슬러 하루를 더 올라가니 주황빛 기와지붕에 웅장하기 그지없는 6층 누각 ‘황학루(黃鶴樓)’에 이르렀다. 등왕각이나 황학루 등 누각들은 그냥 생각하기 쉬운 일개 정자가 아니라 일본의 ‘오사카성’ 같은 일종의 복합고층 궁전과 흡사했다.

 황학루는 시선(詩仙)으로 칭송되는 ‘이백(李白)’의 시심이 스며있는 곳이다.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라 불렸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었다. 호는 ‘청련거사(青蓮居士)’ 또는 적선인(謫仙人)으로 불리었다.

 젊은 시절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고 한때는 현종과 양귀비 밑에서 궁정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방랑으로 끝난 비운의 시인이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써 현종과 양귀비의 연회장에서 지은 것이다.

 이백은 벼슬아치인 ‘하지장’ 등을 비롯한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하여 ‘술 속의 팔선(八仙)’이라 불렸으며 술에 취한채로 황제의 부름을 받으면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가 56세 때인 755년 안사의 난으로 장안을 버리고 촉나라로 피신했지만 역모에 연루되어 투옥과 유배를 반복하다가 장강 삼협 근처에서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안후이성 당도의 현령이었던 ‘이양빙’에 의탁해 살다가 61세에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장강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동정호로 뛰어들어 익사했다고 한다.
 황학루에서 친구 맹호연을 배웅하며 남긴 이백의 시를 돌아본다.
 
故人西辭 黃鶴樓/  煙花三月 下揚州/  孤帆遠影 碧空盡/  惟見長江 天際流.

옛 친구는 황학루를 서쪽에 남겨두고/ 꽃 가득한 춘삼월에 양주로 떠나가네/
돛단배는 푸른 하늘 저 멀리로 사라지고/ 하늘가로 흘러가는 장강만 바라보이네.

 황학루를 뒤로 하고 이튿날 우리가 탄 배는 처절한 역사의 편린을 간직한 ‘적벽(赤壁)’을 지나친다. 서기 208년‘ 손권과 유비의 5만 군이 조조의 20만 대군과 접전하여 화공으로 대승을 거두고 이를 계기로 오(吳)와 촉(蜀), 그리고 위(魏) 3국이 정립(鼎立)하게 된다.

 강변 바위에는 해서체의 붉은 글씨로 ‘赤壁’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삼국시대 오(吳)의 명장으로 적벽대전에서 위를 꺾었던 ‘주유(周瑜)’가 210년경에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적벽을 지나가니 유서 깊은 ‘동정호(洞庭湖)’와 ‘악양루(岳陽樓)’가 다가온다. 동정호는 장강과 연결된 드넓은 호수인데 연안의 야트막한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 악양루는 노란지붕에 처마가 한껏 치켜 올라간 모습이었다. 층수도 3층으로 지금까지 보아온 등왕각이나 황학루  보다는 좀 작은 규모였지만 호수와 수풀 등 주위의 풍광은 더 수려해 보였다.

 두보(杜甫)의 유명 시 ‘등악양루(登岳陽樓)’는 시성(詩聖)으로 호칭되는 역대 중국 최고의 시인인 두보가 유랑생활 중이던 57세(768)에 동정호 악양루에 올라서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또는 두공부(杜工部)이다.

 그는 유비현덕이 최후를 맞았던 중경근처 백제성(白帝城)에서 배를 타고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등 삼협(三峽)을 지나 형양(衡陽)에 도착했으나 세상이 여전히 어지러웠다. 두보는 형양을 떠나 강릉(江陵), 공안(公安)을 거처 악주(岳州 = 호남성(湖南省) 악양(岳陽))에 이르러 얼마동안 머물렀다. 이때에 「등악양루(登岳陽樓)」란 5언절구(五言絶句의 시를 지었다.

昔聞洞庭湖/ 今上岳陽樓/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

예로부터 동정호를 들어 왔지만/ 이제야 그 악양루에 올랐도다/
오와 초는 동남 녘에 뻗어있고/ 하늘과 땅과는 밤낮으로 물위에 떠 있구나/
친척과 벗들은 편지 한 장 없고/ 늙고 병든 몸 외로운 배로 떠도는데/
고향 산 북녘은 아직 전쟁터라/ 난간을 기대어 눈물만 흘리노라/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이었던 두보는 인간의 심리나 현실적인 자연 가운데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시의 소재로 하였다. 두보의 시중 장편으로 엮은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두보는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주로 각지를 유랑하며 이백. 고적 등과 가까이 지내며 자신의 견문과 시 세계를 넓혀갔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작은 관직을 얻었으나 대기근으로 이마저 내던지고 쓰촨성(四川省) 청두에 정착하여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우니 후세사람들이 이를 ‘완화초당’이라 불렀다.

 54세에 청두를 떠나 장강을 따라 유랑생활을 계속하며 시작에 몰두하다가 배 안에서 병을 얻어 장강 동정호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는 대표작으로는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여인행(麗人行)’등이 있다. 그 외에도 ‘두공부집(杜工部集)’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 등도 전해온다.

 그의 작품과 시풍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고려시대부터 여러 권의 작품이 소개되었고 조선사대에는 세종대왕 시절의 ‘두시언해’를 비롯해 성종 때는 ‘유윤겸’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篡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유일한 두시전서(專書)이다. 현대에 나온 번역서로는 ‘이병주’의 ‘두시언해비주(1958)’와 ‘양상경’의 ‘두시선(1973)’등이 간행되었다.

 동정호를 지나치니 삼국지의 본향인 ‘형주고성(刑州古城)’이 다가온다.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형주시내 입구에는 거대한 ‘관우’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높이가 한 20m쯤 되는 것 같았다. 적벽대전 후 관우가 주둔했던 형주성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삼국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아직 석회가 개발되지 않아 쌀로 떡을 쪄서 모래와 섞어 시멘트처럼 벽돌사이를 채우고 성벽을 쌓았다. 그래서 나중에 벌레가 먹어 수시로 보수공사를 했다고 한다. 

 촉(蜀)과 오(吳)는 힘을 합쳐 적벽대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나 서로 형주를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형주는 장강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중원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 처음엔 촉의 영토였던 형주는 기습작전으로 오의 수중에 떨어지고 관우가 최후를 맞았지만 이후 60여 년간 서로 싸운다. 점점 강해지는 위(魏)를 앞에 두고 싸움을 계속하던 촉과 오는 차례로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형주를 지나 만 하루를 더 나아가니 2011년에 완공 되었다는 거대한 ‘삼협댐(산샤댐)’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 삼협댐은 높이가 130여m에 이르는 낙차를 극복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갑문을 거쳐 배가 상류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일단 배들이 갑문 안으로 들어가면 뒷문을 닫고 다음 갑문의 수위까지 물을 천천히 채운 다음 앞문이 열리면 다음 갑문으로 들어가서 또 물을 채워 올리는 식이었다.

 세계최대의 수력발전 댐으로 완공 전에는 세찬 급류 때문에 배가 다니기 어려웠는데 만수위에 이른 지금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항행이 편해졌다. 단번에 댐 상류로 배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거대한 선박용 엘리베이터도 있지만 사용료가 계단식 갑문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고 한다. 한 칸에 일만 톤짜리 커다란 배가 네 척씩이나 들어갈 수 있는 갑문 다섯 칸을 모두 통과하여 낙차 130m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12시간이 걸렸다.

 댐 상류는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여 배의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석회암 바위로 이루어진 신비로운 비경과 코발트빛 물색, 수직에 가까운 주변의 절벽들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수 백m나 되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계곡 신녀계(神女溪)를 지나니 장강 삼협이 차례로 다가오며 그 장엄한 자태를 드러낸다.

 장강 삼협은 하류로부터 후베이성과 중경시의 경계에 있는 45km길이의 무협(巫峽), 길이가 70km에 이르는 서릉협(西陵峽)과 함께 길이는 8km에 불과하지만 100m남짓한 강폭 양안에 수 백m에서 1000m가 넘는 직벽과 산으로 둘러싸여 이태백이 이곳을 ‘기문천하웅(虁門天下雄)’이라고 칭송하였다는 천하절경 구당협(瞿塘峽)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강 삼협이 끝나는 지점에 말년의 유비(劉備)가 여생을 보낸 ‘백제성(白帝城)’이 있다. 백제성은 원래 육지로 연결된 벼랑위의 성이었는데 지금은 장강 댐으로 말미암아 섬이 되어 기나긴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백제성과 중경 일대는 삼국시대 ‘촉나라’의 발원지이다.

 촉(蜀), 또는 파촉(巴蜀), 촉한(蜀漢)은 중국 삼국시대에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후손 현덕(玄德) 유비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지역에 서기 221년에 세운 나라로 한때 티베트 지역까지 통치했었다. 중국 삼국시대가 정립(鼎立) 상태에 있었을 때는 왕국이 잘 유지되었으나 위(魏)와의 전쟁에다 환관 황호(黃晧)의 전횡까지 겹치면서 국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다가 263년 위나라의 공격에 항복함으로써 42년 만에 멸망하였다.

 다음 날에는 장개석의 중화민국 초기 화폐에 등장했던 석보채(石寶寨;절벽에 붙여 세운 10여 층의 높다란 목제 불탑)를 거쳐 중경에 입항함으로써 11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끝으로 이번 문학기행중에 쓴 자작시(自作詩)를 소개한다.
 
장강 기행 /  김영진

등왕각은 왕발이요/  이태백의 황학루라./  석양으로 거스르니/  처연한 적벽인데/
다가오는 동정호는/  두보의 눈물인가…/  삼국지 형주 지나/  웅대 갑문 올라서서/
강호를 넘나들고/  신녀계 뒤로하며/  서역만리 일엽편주/  장강 삼협을 가른다.
창백한 만월은/  절벽위에 외로운데/  내 배는 고요히/  은파타고 흐른다.
덧없는 인간사/  수만리 머나먼 길/  파촉 땅 누벼 내린/  강물 따라 스쳐간다.

이를 성당시(盛唐詩)의 문체인 7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漢詩)로 의역(意譯)했다.

         泛舟長江 過三峽                            범주장강 과삼협

遊覽長江 遡及遊/  凄然赤壁 片鱗浮          유람장강 소급유/  처연적벽 편린부
淚痕工部 洞庭水/  豪俠謫仙 黃鶴樓          누흔공부 동정수/  호협적선 황학루
皎潔孤輪 臨絶岸/  雄渾三峽 壓華舟          교결고륜 임절안/  웅혼삼협 압화주
無常滅盡 人間事/  數萬里程 隋共流          무상멸진 인간사/  수만리정 수공류
                                                                       -끝-


김영진 대한치과의사문인회장,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