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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행복

Relay Essay 제2231번째

시험기간마다 한번 보면 모든 걸 기억하는 능력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든다. 그럼 시험지를 받아도 백지상태로 머리가 멍해지는 일은 없을 텐데. 너무나 바쁜 아침 차열쇠를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온 집안을 무한궤도를 그리며 어지럽히지 않아도 되며 머리를 쥐어뜯지 않아도 될 텐데, 남자친구나 여자 친구와의 기념일을 깜빡해서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로 삐진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느라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과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증상을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이라 한다. 이 증후군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종종 드라마, 문학 속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등장해 왔다. 인생의 매순간을 기억하며 눈앞에 플레이 버튼을 누른 것처럼, 지금 순간의 일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물건을 다른 곳에 두었다 잊어버리는 일도 없고 중요한 할 일을 놓치는 경우도 없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4년전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순간에 숨은 멎으셨지만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던 온기와 시간이 지나면서 차가워지던 몸의 촉감이 기억나지만 견딜 수 있는 건 매년 새해가 찾아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순간의 촉감과 기억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하루에도 순간 이불을 걷어차고 싶을 만큼 민망한 과거의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누군가와 한 이별, 나쁜 기억들과 힘든 일들을 겪기도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건 시간이 지나면 모든 기억들이 흐려지고 무뎌지며 잊혀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걸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10년 전의 의미 없는 사건도 사진처럼 생생히 저장돼 현재와 함께 살아가며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수준의 기억만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기쁨은 물론 슬픔, 좌절, 분노, 고통 등)도 똑같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흔히 과거가 좋은 이유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아픔이건 공평하게 모두 지나간다. 이러한 ‘망각’의 행운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망각의 의미를 수동적으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초월하고, 벗어나려는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행동이라고 하였다. 그냥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망각이 주는 의미를 우리 삶을 좀 먹는 암울한 기억들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망각으로 비워진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와,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우리가 새로운 주체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과거의 사랑을 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기존의 낡은 생각에,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을 제거(망각)하고 한걸음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보면 망각은 어쩌면 신의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나지 않아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릴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상처가 흉터를 남기듯,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고 기억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세월호 사건처럼 말이다.

주혜민
부산대치과병원 구강내과 전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