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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치의와 시골 치의

그림으로 배우는 치과의사학- 12


이솝 우화는 동물이 의인화되어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꼭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베짱이, 사자와 생쥐, 도시 쥐와 시골 쥐. 모두 보편적 진리와 올바른 삶에 대한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이솝 이야기는 세계 어린이들의 도덕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는데, 치과대학 학생뿐만 아니라 치과의사를 위한 덕성 교육을 위한 교재로도 삼을 만하다. 의료 윤리에 대한 사회적 경종이 울려 퍼지는 상황에서 이솝 우화는 누구나 알지만, 치과에서는 누구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이솝 우화는 다양한 갈등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치과에 뜻밖의 지혜를 선사할 수 있는 지침서다.    

전국에 만 육천여개의 치과가 도시와 시골에 있다. 어디에 있든 도시와 시골을 오고가면서 치과의사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시골에는 정이 있고 도시는 삭막하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 다시 이솝 우화로 돌아가서 도시 쥐는 부족함에는 불만을, 풍족함에는 예찬을 한다. 반면 시골 쥐는 부족함과 안전함에 나름 만족하며 산다. 또한 시골 쥐는 도시 쥐와 비교도 하지 않으며 비교를 당해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개원의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 개원을 하건 의술을 행하고 인술을 펼치는 것이 본질이다. 의술과 인술을 멀리하고 산술을 밝힌다면 이솝 우화의 도시 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불안하며 달콤하게 사는 것 보다는 검소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행복 치의로 가는 길이라 생각된다.


영국 화가 Robert Dighton(1752-1814)의 그림을 기초로 하여, 약사이자 인쇄업자인 William Davison(1781-1858)이 18세기 말 영국에서 치아를 치료하는 모습이 담긴 동판 판화를 출판하였다.‘The Town Tooth Drawer’의 공간적 배경은 도시 주택의 거실로 보이며(그림1), ‘The Country Tooth Drawer’은 시골 마을의 대장간이다(그림2). 그림1의 발치사 모습에서 신사의 품격과 매너가 물씬 풍겨진다. 어떠한 상황에도 말과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그림2에서는 뛰어난 손기술을 가진 대장장이가 발치를 하고 있다. 발치가 본업은 아니지만 대장장이의 장인정신과 손의 미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림1의 장소는 진료를 받고 있는 귀족 부인의 집 거실이다. 발치사는 정장(frock coat)과 가발을 착용하고 있으며 바른 자세로 tooth key를 이용하여 부인의 상악 중절치를 발치하고 있다. 그 옆에는 하녀가 두 손을 모은 채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에 발치사의 조수인 흑인 소년은 기구 상자를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놀란 고양이는 아마도 고통스러운 환자의 울부짖음을 뜻하는 작가의 의도로 해석된다. 벽에 걸린 새장에서 들리는 평화로운 새소리는 진료실의 소음과 불협화음을 이룬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새로운 유형의 개업의(dentist)가 탄생하였다. 이 시기에는 치과 전문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독립된 진료실에서 발치, 수복, 보철 및 치주 치료를 시행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에 치과의술은 존경받는 전문직업이라기 보다는 사업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로 언급하면 1858년에 치과의사 면허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었고 1860년 전문 교육을 받은 치과의사가 최초로 배출되었다. 1800년대까지 영국에서 활동했던 치과개업의는 대략 60여명(런던 40명)이었다. 그림1에서 창문에 비치는 꼭대기 탑은 영국 북동부 뉴캐슬어폰타인(Newcastle upon Tyne)에 있는 St. Nicholas Cathedral이다. 그림1의 치과의사는 60명중에 한 명으로 추정된다.   

그림2는 영국의 전형적인 깡시골에 있는 대장간 내부의 전경이다. 유리창도 없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언덕과 오두막집이 외딴 곳이라는 근거이다. 발치를 하는 대장장이의 모습에 의아해 하실 분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의료 사각지대인 시골에는 떠돌이 돌팔이 의사도 찾아오지 않았기에 떠오른 대안이 대장장이였다. 18세기 시골에서는 흔한 일상이었고 19세기 후반까지 대장장이가 발치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대장장이는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발치를 위해 필요한 상당한 손기술을 지녔고, 필요한 기구도 직접 만들 수 있었다.   

그림2를 보고 있노라니 ‘오호통재’가 절로 나온다. 의자에 앉아 시골 아낙이 고통스럽게 치과치료를 받고 있다. 얼마나 아팠으면 그녀의 오른손은 대장장이의 코를 꼬집고 있고 왼손은 그의 오른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있다. 환자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발치하는 대장장이의 그 철저한 직업정신에 더 가슴이 저린다. 술자는 여전히 발치에 몰입하고 있고 보조자는  환자 뒤에서 완벽하게 머리를 고정하고 있다. 여성의 아들로 추정되는 소년은 얼굴이 찌푸려져 있고 화가 나있어 보인다. 마치 엄마를 힘들게 하는 대장장이의 등을 힘껏 때릴 모양이다. 설령 맞더라도 대장장이는 참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게 맞는 이치이다.      
  

이번에 살펴 본 두 장의 그림은 미술사적인 의미는 없으나 치과의사학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18세기 치과 치료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도 뛰어난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가 있었다. 단원풍속화첩에 그려진 ‘대장간’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8세기 조선시대에서도 대장장이가 발치를 했을까? 문득 이런 궁금증과 단원도 치아를 치료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으면… 이런 아쉬움이 가득하다.    


권 훈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미래아동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
2540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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