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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the Gap

오지연의 Dental In-n-Out

아들이랑 프리미어 리그 골 모음을 보는데, 관중석에 ‘Mind the Gap’이란 손 팻말이 있었다. 별로 안 궁금한 척 담담한 표정으로 나름 괜찮은 말이네 툭 던졌더니 역시나 걸려든 아들은 천일야화 같은 EPL스토리를 풀어 놓는다.

어느새 물으면 짐짓 잘 안 가르쳐 주고, 다 안다고 하면 굳이 더 많은 걸 알려주려고 하는 남자 그 자체가 되어버린 아들에 한동안 아연실색 했었지만, 곧 대책이 섰다. 뭐 이쪽도 내공이 있으니까. 손흥민이 있는 토트넘 핫스퍼와 아스날이 북 런던 라이벌인데, 오랫동안 아스날이 절대 우위였지만 올 시즌 토트넘이 리그순위에서 앞섰단다. 한 때 초강팀 이었지만 최근 계속 부진했던 아스날의 팬들이 지역 라이벌인 토트넘 보다는 성적이 좋다는 점을 유일한 위안거리로 여기며 하던 말이 바로 “그렇게 나쁘진 않아. 적어도 토트넘 하고는 승점차가 좀 나지. 그 격차를 명심해! (Mind the Gap!)” 이란다. 오늘 저 팻말은 그러니까 토트넘이 올 시즌 선전하고는 있지만 과거를 통틀어 아스날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다는 뜻 정도일 텐데, 북 런던 더비가 100년이 넘은 라이벌전이고 팬들의 충돌을 우려해 반드시 한낮에 열리는 치열함을 감안해 준다 해도 몰락을 예감한 초조함이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 문구가 되고 만 것이다.

물거품이 되어가는 이번 시즌 성 토터링엄의 날을 여전히 붙잡을 수 있다고 우기는 저 애처로운 허세에 뜬금포로 떠오르는 에쿠니 가오리의 한마디. “여자는 멋진 남자 때문에 제멋대로 우는 거지, 그가 울려서 우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뭐든 억지로는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설사 함성으로 경기장이 날아가기라도 할 듯 과열된 혼돈의 카오스 한 복판에 있다 해도 말이죠.

열차와 플랫폼 간격을 주의하라는 영국 전철역의 안내방송이기도 한 저 문구는 한때 단어를 똑똑 끊어서 발음하는 바리톤의 매력적인 남성 목소리로 관광 상품이 될 정도였다. 배를 꾹 누르면 저 안내문구가 나오는 인형도 있었다. 최근엔 여자 목소리로 바뀌었고 승강장 바닥 열차 출입문 위치마다 써 놓아 승하차문 찾는데도 편하다.

생긴 지 하도 오래 되다보니 노선별로 객차의 사이즈나 바닥 높이도 다 달라서 우리처럼 안전 문을 설치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 ‘틈을 잊지 마세요’라고 간곡히 상기시켜 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Watch your step!’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부드럽고 상냥하다. 딱히 내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좀 미안하게 됐어 라는 저런 투로 말하면 듣는 사람이 방어적이 될 이유가 없지만, “(난 분명히 경고했으니) 책임은 다 네 발이 져야 돼.”라는 식이어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거친 저항을 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상대가 그냥 나를 훅 통과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는, 그래서 전달하려는 내용 자체에 관한 무궁무진한 연상으로 곧장 이끌 수 있는 그런 방식의 말하기가 필요할 것 같다. 정치인이나 치과의사에겐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엄마에게도.

봇물 터지듯 굽이굽이 여러 유럽구단들의 흥망성쇠까지 섭렵해 준 아들 덕에 더 알게 된 얘기로는, 첼시나 FC 바르셀로나 같은 빅 클럽과의 정면승부가 현재로선 솔직히 힘든 포르투갈의 벤피카 같은 클럽은 제3국 등에서 유망주를 데려다가 육성시켜서 빅 클럽으로 이적시키는 비즈니스로 꽤 큰 수익을 올린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다른 많은 클럽들도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결과 유명 선수 뿐 아니라 조제 무리뉴,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 등 유명감독, 조르제 멘데스 등의 세계적 에이전트까지 육성, 배출 하는 가히 국가적(?) 특화를 이뤄냈다. 금이 될 수 없으면 은이 되라는 말처럼, 스타플레이어를 영입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중소 구단이 빅 클럽과의 규모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스스로의 생존전략을 만들어 낸 현명함에서 역시 ‘Mind the Gap’이란 중후한 당부가 읽힌다. 발빠짐 주의! 라고 해서야 연상 되는 멋진 것이 별반 없는데, 나만 그런 것인지?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