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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에 대한 관점 전환과 합리적 의학의 탄생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2

탈레스를 비롯해 밀레토스학파 사람들은 지진이나 번개 등과 같은 자연현상을 포세이돈이나 제우스와 같은 신을 끌어들여 설명하는 방식을 탈피하여 그 현상을 자연적인 요소로 설명함으로써 합리적 사고에 의한 철학의 길을 열었다. 그 후 히포크라테스학파도 질병을 자연적 요소로 설명함으로써 합리적 의학을 탄생시킨다.

이전에는 질병이란 신의 격노에 의해서 생기며 질병의 치료도 결국 신에 달려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의 서사시에 나타난 의술의 전형적 형태는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의 오만불손에 신이 격노해 인간에게 질병을 보내고, 예언자가 그 격노의 원인을 추정하여 기도나 제의로 신의 격노를 누그러지게 해서 병에서 벗어나게 한다. 히포크라테스학파가 합리적인 의학을 확립할 무렵에 주술적·종교적 의술은 고도로 정교한 방법과 이론을 갖추고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히포크라테스전집 중 한 작품인 ‘신성한 질병에 관하여’의 저자는 주술적·종교적 의술을 행사하는 무리를 거세게 비판한다. 그는 최초로 질병을 신성화한 사람들을 ‘마법사들’, ‘정화꾼들’, ‘사기꾼들’, ‘돌팔이들’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리고 그들이 질병을 신성화하는 까닭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게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환자가 건강해지면 평판과 경사를 제 것으로 하며, 환자가 죽으면 자신들은 전혀 책임이 없고 신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핑계거리를 갖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특히 ‘신성한 병’으로 불렸던 ‘간질병’과 관련해서 이 질병이 다른 질병들보다 딱히 더 신적이라 할 것이 없음을, 다시 말해 신이 보낸 질병이라고 볼 수 없음을 두 가지 근거를 들어 밝힌다. 그 하나는 이 질병이 ‘유전적(kata genos)’이라는 것이다. 만일 유전적이라면 부모가 원인이 되서 자식이 질병에 걸리는 셈이 되므로, 특별히 신을 그 질병의 원인으로 거론할 이유가 없어진다. 다른 하나는 “이 질병은 본디 점액질의 사람들에게는 생기는 데 반해, 담즙질의 사람들에게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 질병이 다른 질병들보다 더 신적인 것으로서 신이 보낸 것이라면, 담즙질 사람에게만 간질병이 발생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저자는 간질병이 다른 질병보다 더 신적이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모든 질병이 다 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질병이 신이 보낸 질병이라는 점에서 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다른 의미에서 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질병이 신적인 것일까? 그것은 모든 질병이 자연적인 기원을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질병들은 다 일정한 인과적 규칙성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규칙성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규칙성에 따라 질병들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모든 질병은 신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간질병이 특정한 내적, 외적 조건 아래 두뇌로부터 점액이 과도하게 흘려내려 두뇌로 가는 공기의 흐름이 차단되어 나타난 두뇌 기능의 손상 현상으로 본다.

히포크라테스전집 중 ‘공기, 물, 장소’의 저자도 신의 탓으로 돌려지던 스키타이인들의 성기능장애와 관련해서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그는 그 장애는 부유층 사람들이 승마로 인해 발생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이 질병은 자연적인 요인에 따라(kata physin) 생기는 것이지 신이 보낸 것은 아님은 역설한다. “만일 이 질병이 신이 보낸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 질병에 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유한 사람만 그 질병에 걸린다. 따라서 이 질병은 신이 보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합리적 의술이 탄생한 이후로도 종교적 의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합리적 의술도 신전의술도 서양의 의신으로 일컬어지는 아스클레피오스를 받들며 오랜 기간 공존했다. 이 두 의술은, 질병은 신이 보낸 것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는다. 하지만 신전 의술은 합리적 의술의 대안적 의술이었다기보다는 합리적 의술의 한계 속에서 최후 수단으로 용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암학당 학당장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