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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 -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

시론

얼마 전 환자가 되어 병원을 찾을 일이 있었습니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신기하게도 저희가 매일 출퇴근 하는 공간인데도 제가 환자가 되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은 공기부터 다릅니다. 알코올을 비롯한 여러 소독제, 약제가 섞인 냄새가 여기가 병원이구나 하는 것을 인식시켜 줍니다. 데스크에 가서 접수를 하고 대기실에 앉아서 순서를 기다립니다. 대기 시간이 20분이 지나자, 빨리 진료받고 일하러 가야 하는데 이거 한 시간은 기다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슬슬 초조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원장이었을 때는 30분 기다리다 들어온 환자가 불평을 하면 여기가 식당이나 미용실도 아니고 왜 저럴까 싶었는데 그 심정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환자분 들어오세요.’하는 호출에 진찰실로 들어가서 원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진찰을 받았습니다. 몇 군데 집어보고 몇 가지 물어보더니 별거 아니라고 합니다. 남들이 들으면 우습다 할 정도로 정말 별거 아닌 증상을 가지고 혼자 머릿속으로 망상을 하며 애들과 집안 걱정으로 며칠을 고민했는데, 무엇보다 큰 병이 아닌 것에 안도감이 들면서 믿지 않던 신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찰 마무리에 하지만 다른 병이 있을 수도 있으니 지켜보자는 원장님의 한마디가 마음에 걸리며 약간의 불안감을 남깁니다. 치과 진료를 할 때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환자에게 던지던 ‘근데 뺄 수도 있어요’라는 진료 방어적인 멘트가 환자의 마음을 얼마나 불안하게 했을 지 반성해 봅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치료실로 이동합니다. 치료 전에 간단히 설명을 해준다며 지금 받게 되는 치료는 마취를 부분적으로 하고 주사를 이렇게 이렇게 놓고 요래저래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을 해주지만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멍청해 보일까 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 했습니다. ‘다 이해하셨지요?’라는 질문에는 ‘예!’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이해도 못했고 약이나 치료법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산더미지만 나중에 인터넷으로 검색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말았습니다. 치료 대기를 하면서 아플까봐 걱정도 되고 꼭 치료를 받아야 하나 싶어서, 다음에 온다고 하고 그냥 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아뿔싸 나갈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원장님이 들어와서 마취를 해주는데 조금 따끔할 거라고 하더니 많이 따갑습니다. 그래도 마취가 잘됐는지 그 뒤로는 얼얼하니 감각이 없었습니다. 치료가 시작되고 계속 기구를 들었다 놨다 달그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리는데 이게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지 모르니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러다 마취가 덜 된 부위가 있었는지 눈에 불꽃이 노랗게 튀면서 찌릿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치가 보여서 아프단 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는데 그 뒤로는 혹시나 또 아프지 않을까 싶어서 좌불안석입니다. 아프지 않은데도 계속 긴장이 되고 등에서 식은 땀이 납니다. 신경치료나 사랑니를 뺄 때 왜 환자들이 목과 어깨에 힘을 주고 긴장 상태로 있는지 백분 이해했습니다.

환자는 저희가 배려하고 아끼며 이해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저 나름대로는 환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환자의 두려움과 어려움을 저는 십 분의 일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비로소 환자가 되어보고 난 뒤에야 환자의 기분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관계가 있지만 본인이 직접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충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지사지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 최저임금위원회는 회의를 개최해 약 8시간의 노사간 논의 끝에 ‘2018년 적용 최저임금 수준(안)’을 시급 7530원으로 의결하였습니다. 저희 같은 자영업, 개원의 들에게는 염려가 될 정도의 가파른 임금 인상이었습니다. 야간이나 주말 진료를 하는 치과라면 수당을 포함하여 실수령 170만원 이상을 지급을 해야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4대보험, 퇴직금 인상 등을 감안하면 인건비 지출 인상에 따른 원장의 부담은 이보다 더 커집니다.

하지만 이왕 줄 월급이라면 그래도 조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긍정적인 역지사지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의 20만원과 직원들의 20만원은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저는 20만원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없지만, 20대 초반부터 30세 전후의 그 분들에게는 정말 가지고 싶던 무언가를 사거나 알뜰살뜰 모아서 정말 가보고 싶던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요긴한 자금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아니면 학자금 대출을 갚거나 집안에 도움을 드리는 효녀도 있겠지요. 많은 돈이 아니지만 직원들의 마음의 짐은 한결 가벼워 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상을 하면 조금은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이번 임금 인상은 가족보다 긴 시간을 함께하는 직원들을 생각하며 즐겁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직원들도 가끔은 원장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왜 원장들이 1년에 몇 명씩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가게 되는지, 괴팍하다고 흉만 보지 말고 외줄타기 하는 심정인 원장들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금만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정책 수립을 하는 분들께서도 이제는 제발 상대적 소수인 의료인들을 정치쇼에 이용만 하지 마시고 어여삐 봐주셨으면 합니다. 오는 27일로 예정되어 있는 ‘건보 보장성 강화 대책’ 담화에서 ‘비급여 표준화 정책’을 중요 발표한다니 산 넘어 산입니다. 어떤 수준의 비급여 수가가 제시될지 모르겠지만, 지난달 고시된 ‘의료기관 제증명 수수료 항목 및 급여에 관한 기준’에서 진료확인서 등이 단돈 ‘1000원’으로 묶인 선례를 볼 때 별로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수가는 아닐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한민국의 의료인들은 학교 다닐 적에 나라에서 책 한 권 안 사줬어도, 비현실적인 보험 수가 속에서도, 명찰 달아라, 설명해라,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온갖 간섭 속에서도 군말 없이 묵묵하게 열심히 진료해 왔습니다. 국가의 지원 한푼 없어도 주말에 세미나 쫓아다니며 공부하고 어느 나라 의료인들보다 수준 높은 의료를 펼쳐왔습니다. 정책을 수립하는 높은 분들께서는 제발 자영업자들, 특히 의료인들에 대한 고까운 시선을 거두시고 원장들의 처지도 입장 바꿔서 생각해봐 주었으면 하는 허황된 희망을 가져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강희
연세해담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