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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지헌택 선배님께…

추도사

“옛 말에, 서산에 해가 기울면 노을이 더 아름답고, 한 해가 저물 때 오히려 귤향기가 좋아진다잖아… 사람은 만년에 정신을 백 배 천 배 더 가다듬어야 해… .”

모학회 학술대회장 연자준비실에서 뵈었던 선배님의 또박또박하시던 音聲이 지금도 제 귓가에 생생하게 울립니다.

아흔 다섯 平生, 大韓民國 치과계의 젊은이들에겐 젊은 치과의사로서의 正義로운 覇氣와 熱情을, 중년의 우리들에겐 중년치과의사로서의 堅實한 너그러움과 犧牲을, 장년의 선배들에겐 장년치과의사로서의 아름다운 姿勢와 주어진 소명을 마무리하는 본보기를 내내 보여주신 선배님을 떠나보내는 저희들의 허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表現해야할 지 도무지 낯설기만 합니다. 저희들 모두가 선배님을 뵐 때 마다, 원래 여기에 이렇게 계시고 언제까지나 저희 곁을 그렇게 지켜주실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지금도 저 만치서 저벅저벅 걸어오시며, ‘잘 지냈어요?’ 하며 잔잔한 미소로 손을 내미실 것 같습니다.

1947년 서울치대를 卒業하시고, 1967년 연세치대를 設立하시던 당시의 回顧와 1972년부터 1992년까지의 보철학회장, 서치회장, 대치협회장, 아시아태평양치과연맹(APDC)회장의 길을 걸으며 겪어오셨던 激動期의 수많은 사연들을 틈틈이 들려주시던 선배님의 眼光과 音聲에서, 저희들은 선배님의 겨레에 대한 사랑과 치과계에 대한 아버지같은 마음을 수없이 보았었습니다. 國內의 목련장 수훈과 공로상은 물론, 몽골의 國家的 最高感謝 표시라는 친선훈장 수훈은, 선배님께서 이끌고 이루어내신 1965년 치과위생사교육기관설립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대한민국치과위상의 제고등과 더불어 선배님의 미래에 대한 비전과 노력으로 촘촘히 채워진 위대한 삶 속에서, 그 한걸음 한걸음의 발자취를 따라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約束된 歷史들이었음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늘 나지막한 음성으로 뜻 깊은 이야기들과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되는 위트들을 전해주시며 저희들에게 지혜와 사랑을 나누어주시던 선배님에 대한 기억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 선배님께서도 제일 생각이 많이 나는 일이라면, 가슴 벅찬 표정으로 전하시던 날이 기억납니다. 昨年 2月 어느 날, 서울치대동창회 常任拷問이신 선배님께서 母校 同窓會理事會에 나오시어, 晩餐을 마치고 談笑를 나누시던 중에 故 김주환교수님께서 군대시절 소총을 거꾸로 들고 있더라는 이야기에서, 故 안형규교수님께서 어려운 시절 다른 이들을 많이 도우셨다는 사연들까지 이런 저런 즐거운 일들을 回顧하며 전해주시다가, 문득 긴 말씀을 시작하시었습니다.

‘내가 부끄러워하는게 남에게 무엇을 거저 받는 일인데… 1966년이었을거야, 국내 치과대학이라곤 서울치대 뿐이었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대학임에도 임상교육여건이란게 너무 열악했어. 나는 미국 유학후 세브란스의과대학에 소속되어 치과보철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는데, 내가 공부 다녀온 미국 미시건대학에서 학내기념행사가 있어 동양에서는 나를 초청하니 좀 와달라는 거야. 그래서 갔는데 마침 그때 미시건대학의 유니트체어를 비롯한 치과임상교육기자재들을 교체하는 중이더라고. 우리나라의 치과의학교육 처지에 대한 근심걱정으로 머리가 가득한 내 눈에는 선진국의 그 노후 기자재들조차 너무 귀하고 소중해 보였어요. 나는 염치불구하고 다짜고자 그 대학의 책임자에게 저 기자재들 중의 일부, 아마 스물 다섯 대였을 거야. 그걸 우리나라에 달라고 떼를 썼지. 허허, 그 일로 방문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쪽에서도 당황하고 앞뒤 없이 떼를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나 자신이 봐도 부끄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그런데 당시 학장이 미시건대학은 그런 노후기자재를 계속 남미에 보내오고 있으니, 미안하지만 내 부탁은 들어주기 어렵다고 대답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오는 날까지 나는 그 사람들 만날 때 마다 그 기자재는 우리나라가 더 필요하니, 무슨 수가 없겠냐고 계속 졸라댔지, 허허…  사실 우리나라 당시 상황을 보면 그런 기자재를 마련하려면 수 십 년은 더 걸리겠고, 정부가 그런 사실에 관심을 가져줄 희망도 없었기에 난 떼를 쓸 수 밖에 없었어.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다는 걸 난 그때 알았어요. 그 기자재들이 돌아가신 한성수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스물 다섯 대가 아닌, 무려 일백 대가 우리나라에 보내졌고, 그걸로 많은 것을 이루어낼 수 있었지.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 그동안 내가 몽골과 같이 치과가 어려운 나라를 도우려 애쓴 것도 그때 미국사람들의 고마움을 다른 나라에 전하려 한거야… 돌이켜보면 내 성격에 앞뒤없이 뭐 달라고 그런 억지를 쓴 게 참 놀라워.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 되도록 애썼고, 다행히 옳은 일이 되어서 이제는 부끄럽지 않아. 노력도 했지만 운이 좋았어.’라고 마무리하시던 선배님의 소년 같은 표정을 저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時代를 齒科醫師로 살며, 여러 가지로 종종 우리 自身이 부끄럽고, 옳은 勇氣를 내는 일이 서툴러질 때마다, 池선배님의 삶과 그 메시지를 늘 기억하겠습니다. 선배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하는 사람들인지를 기억하겠습니다.

선배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고입니다. 저희 곁에 계셔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저희 마음속에 늘 함께 계실 겁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平和로이 쉬시길 바라오며, 저희들은 池선배님의 아버지 같은 따뜻한 微笑와 少年처럼 뜨거운 가슴을, 치과의사로 사는 내내 記憶하고 우리들의 후배들에게 온전히 전하겠습니다.

아무리 드려도 부족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전하며….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대학원 동창회장  안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