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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학파에서 의학과 철학의 조화와 분리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4

자연철학자들이 우주의 궁극적 구성요소를 알아냄으로써 우주의 온갖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듯이,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의사들은 인체의 구성요소를 알아냄으로써 이 요소들로 질병이나 건강을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경향은 히포크라테스학파의 의사들 사이에서 큰 흐름을 형성했다. 그런데 그들 중 이런 흐름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의사도 있어 주목된다. 

<전통 의학에 관하여>의 저자는 인체의 구성요소로 한두 가지를 ‘가정’하고서 그것을 의학적 이론들의 기초로 삼는 의사들을 비판한다. 다시 말해 그는 온, 냉, 건, 습 중 한두 가지를 질병의 원인으로 가정하는 의사들을 비판한다. 이는 곧 철학적 의사들에 대한 비판이며 의학을 철학에서 분리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는 특히 철학의 영향으로 의학 쪽에 도입된 가정의 방법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 방법으로는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도 새로운 발견들을 이루어낼 수도 없다고 그는 단언하고, 의학에서 오랜 기간 사용해 온 경험적인 시행착오의 방법이야말로 의학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역설한다.

저자가 경험적 방법을 의학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의학과 철학을 분리하고자 한 것은 그 나름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의사와 철학자는 주된 관심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주로 이론적인 지식에 관심을 두는 반면, 의학은 일차적으로 환자의 치료와 관련한 실천적인 지식 쪽에 큰 관심을 둔다. 그리고 환자의 질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법은 환자에 따른 편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사변적인 이론들은 임상의에게는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차이를 고려할 때 <전통 의학에 관하여>의 저자가 방법론상 의학과 철학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충분히 수긍할 만한 점이 있다. 더욱이 고대의 철학적 의사들은 의학을 철학의 한 부분 혹은 응용 철학쯤으로 여겼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적절한 관계 설정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문제 제기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저자처럼 가정을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개개의 경험을 중시하는 쪽으로 나간다면, 의학은 더 이상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갖기 힘들 것이다. 가정 없이는 사실상 여러 경험적 자료의 일반화도, 현상들에 대한 합리적 설명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캘수스는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을 철학에서 분리시켰다”고 언급하기까지 했지만, <전통 의학에 관하여>라는 저술 이후에도 여전히 철학과 의학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우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만보더라고 그러하다. 플라톤은 의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여 『티마이오스』편에서 몸과 혼의 질병에 대한 설명을 할 뿐 아니라 그 이론을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데도 적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건강이나 질병과 관련해서 일차적인 원리들을 보는 것은 자연철학자가 할 일이다… 거의 대부분의 자연철학자는 의학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 논하는 데서 끝을 맺으며, 의사들 가운데 자신의 기술에 아주 철학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은 자연과 관련된 원리들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의 의학의 학파인 경험론 학파나 합리론 학파만 보더라도 철학과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경험론 학파는 철학의 회의론 학파와 연계되고, 합리론 학파는 자연철학자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학파 등의 사상이 지닌 사변적 측면에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의 의학 학파들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일종의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한 갈레노스도 의학과 철학의 긴밀한 관계를 주목하고 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를 의사들의 귀감으로 내세우며 “가장 훌륭한 의사는 철학자이기도 하다”는 말을 자신의 짧은 글의 제목으로 삼았고, 바로 이 글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추종자들이라면 우리는 철학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찍이 히포크라테스 전집 중 <예법>의 저자는 “철학을 의학으로 옮기고 의학을 철학으로 옮기도록 하라. 왜냐하면 철학자인 의사는 신과 같기 때문이다”고 말한 바 있다. 고대 헬라스의 의학사와 철학사를 보면 ‘철학은 의학으로, 의학은 철학으로’라는 말이 공허한 말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기백
정암학당 학당장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