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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돕는 것이 행복한 삶

시론

필자가 30년을 개원하면서 30대 때에는 매주 학술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데 집중을 하였고 40대에는 의료봉사에 모든 휴가를 반납하고 열심히 했었다. 오늘은 의료봉사의 추억을 더듬어 아쉬움과 보람을 나누려고 한다.

의료봉사는 1997년에 ‘산호수중’이라는 스쿠버 다이빙 동호회원들과 소매물도에서 시작하였다. 동호인들과 연변에서 의료봉사를 한 뒤 백두산 천지에서 하루에 열두 번이 변한다는 하늘을 보면서 했던 한 여름에 하얀 눈이 있는 트래킹은 세상 어디에서도 없는 장엄한 감동을 주었다.

그 후 1999년에 본격적인 의료봉사를 위해 지인의 추천을 받아 열린의사회에 가입했고, 매년 1~2회 해외봉사와 매달 있는 국내봉사에 참여하였다. 2000년에 처음 몽고 울란바토르의 항울병원에서 진료를 하였다. 기존에는 발치만 하였지만 레진을 스폰 받고 대학동기인 장갑성 원장의 도움으로 치과이동장비를 만들어서 주로 전치부 레진치료를 많이 해주었다.

그 인연으로 지금도 1년에 1회씩 몽고에서 오는 의료진들과 만나고 있다. 또 맨 처음 진료에서 통역을 도와주던 학생이 얼마 전에 울란바토르 대학의 한국어과 교수가 되어서 필자의 병원을 방문해 반갑게 만나기도 하였다.

몽골 의료봉사를 15번 다녀오면서 너무나 많은 추억이 남았다. 중학생인 아들과 드루노고비에서 봉사에 나섰던 날, 아침부터 인근지역에서 말을 타고 오셔서 뙤약볕에 1000여 명의 환자가 대기하여 너무 놀랐다. 드로노고비의 하늘은 한국보다 너무 많이 낮고 기차 유리창이 깨져 있어서 너무 추웠던 기억이 있다.

또한 아르항가이에서 진료봉사한 후에 쳐다본 밤하늘, 꽉 차있던 별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는다. 몽고는 하늘이 아름답다. 또한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중 사방이 탁 트인 광활한 평야에서 한쪽은 비가 오고 반대편은 맑은 하늘이고 뒤에는 무지개가 연출되는, 달리던 버스에서의 장관은 잊을 수 없다.

당시 몽고 보건복지부 장관의 별장이 있는 바이칼호에 있는 흡수굴에서의 봉사와 새벽 아침 바이칼호의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에서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았던 타쉬켄트 대학에서의 진료와 삼만명이 사는 고려인 마을에서의 진료는 너무 감동이었다. 한국말을 우리나라 하고 똑 같이 잘하는 중학교 3학년 우리 딸 같은 여학생의 육전치의 충치를 제거하고 레진치료를 해주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너무나 좋아 하는 모습을 보고 “치과의사하기를 너무나 잘했다”는 최고의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루에 30~50명 이상의 전치부 레진치료를 했는데 당시 하루에  현대차 소나타 한대 정도의 치료비에 상당하는 진료를 했다고 농담을 한 생각이 난다.

타쉬켄트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에 치과환자가 너무나 많이 밀려 식사도 못하고 진료하고 비행기를 타니 하늘이 빙빙 돌아 이러다가 과로사를 하나 보다 생각하였다. 그 뒤로는 우선 내 몸을 먼저 돌봐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소중한 자신을 먼저 지키고 사랑하고 타인도 나와 같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인생사의 제일 중요한 기본인 것 같다.

의료봉사 덕분에 KBS방송의 ‘한국 한국인’과 SBS의 ‘나이트라인’에 출연을 하였는데 그 시절만 해도 지금처럼 해외봉사 팀들이 많지 않아서 운이 좋게 많은 매스컴에 출연했던,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기분 좋은 추억이 있다.

특히 당시 아들도 의료봉사에 같이 참여하면서 저절로 좋은 인성교육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무엇보다 “남을 도우면서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한 삶”이고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봉사하는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을 너무나 많이 느꼈다.

다만 치과봉사는 병원에서와는 다르게 열약한 환경에서 하게 되므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자기 몸도 먼저 돌보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지금 생각하면 치료보다 환자교육과 현지 의사 교육이 더 중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 후에 대한치과의사협회에서 일하고 나름대로 교합과 치주, 전신건강을 연구하면서 의료봉사에는 좀 소홀했었는데, 이제 예전에 열심히 했던 의료봉사를 우리 가족 모두가 다시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