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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책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

앞으로 이 칼럼에서는 5회에 걸쳐서 서양철학의 맨 앞에 위치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자연철학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첫 번째 이야기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이 담겨 있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선집’이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단편선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들을 가려 뽑은 책입니다. 이 책의 원전은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자 헤르만 딜즈(Hermann Diels)가 1903년에 낸 책을 다시 그의 제자 발터 크란츠(Walter Kranz)가 1952년에 보완해 낸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의 단편(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s)’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중요한 단편들을 추려서 번역한 책이 바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단편선집’입니다. 이 책은 제가 연구원으로 있는 정암학당에서 저를 포함한 8명의 연구자들이 1997년에 의기투합하여 번역을 시작해서 2005년에 출간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책이 나왔을 때, 서점가의 반응은 그저 그랬습니다. 1년에 1쇄를 찍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어느 때부터인가 판매에 속도가 붙더니 어느 해인가는 한 해에 2~3쇄를 찍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우리 번역자들은 반갑기도 했지만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주목한 것은 우리 책의 판매속도가 빨라질 무렵에 나왔던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인문학 독서로 자기개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으로 수 십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뒤에는 10년간 읽을 서양고전도서목록이 있었고, 그 목록의 1년차에 서양철학책으로는 유일하게 우리 책이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이 사실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이 왜 갑자기 많이 팔리게 되었는지, 이 책 이후 정암학당에서 냈던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이 책보다 더 잘 읽히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도 왜 그만큼 팔리지 않는지, 이 책이 팔리기는 많이 팔리는데도 그 반향은 왜 잘 들리지 않는지 등등.


제가 세운 가설은 이렇습니다. 문제의 베스트셀러를 읽고 감동받은 독자들이 인문학 독서를 통해 자기개발을 하기 위해 10년간의 독서할 결심을 하고, 그 목록 중 1년차에 있는 책들을 샀다. 그리고 절망했다. 그래서 그 뒤의 책들은 사지 않았다.


이 책은 읽기 어렵습니다. 우선 이 책이 후대의 학자들에게 인용된 형태로 전해진 자연철학자들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 뒤 문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단편들을 꿰어 일관된 이해를 갖기가 힘듭니다. 또한 우리와는 시대와 문화가 다른 철학자들의 글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대철학은 단순하거나 틀렸고 비과학적이라는 생각, 또는 그 반대로 철학은 추상적이고 고대철학은 더더욱 심오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서 이 책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들은 오히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흩어져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모으는 재미가 있고, 과학과 학문의 초창기라 그 원형적 사고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고, 우리의 시대와 문화를 벗어나 그 시대 속에서 상상하고 사유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대상화하고 반성하며 재발견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횟수동안 구체적인 그들의 단편들을 통해 이런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주일
현재 정암학당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및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강사.
저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선집>(공역),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I.II>(공역) 등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