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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露尺牘

오지연의 Dental In-n-Out

출근길 라디오에서, 백로까지 패지 않은 벼이삭은 잘 영글기가 힘들고 쭉정이가 된다고 하네요. 심어만 놓는다고 끝이 아니란 것쯤이야 짐작했지만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이삭 패는 시점까지 맞춰야 한다니 그만 좀 뭉클해져 버렸습니다. 그 때 왜 선배님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이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옛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남산의 긴 터널을 지나니’ 병원이었습니다. 아직 백로이니 눈이 왔을 리는 없구요(하하). 여기까지가 이 편지를 올리게 된 내막입니다 라고 말씀 드려봤자 어리둥절해 하시긴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만.

그해 여름, 제가 선배님 병원에서 일인지 걸리적거리기인지를 하게 된 것은 실로 여러 가지 우연들이 교차된 결과였습니다. 뭐든 멋있지 않을 바에야 그냥 안 해 버리고 말겠다는 뒤늦은 사춘기를 겪는 중이던 저는 여름방학 동안만이라도 일손이 되어달라는 선배님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어 출근은 했지만 마음은 완전히 콩밭-철들고는 결코 해 본 적이 없는 무위도식을 제대로 한 번 해 보고 싶다는-에 가 있었습니다. 그 날 사랑니 발치를 할 선배님 환자 한 명이 약속을 취소 한 걸 미처 모르고 어시스트가 소위 ‘밥상’을 차려놓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때 근처에서 빈둥거리던 제게 매복 사랑니가 없었더라면 저는 어쩌면 지금 치과의사 생활을 안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차려진 밥상 아까우니까 후배 네 사랑니라도 뽑아줄게 하시며 눈 깜짝할 사이에 발치를 해 주시곤 휑하니 점심식사 하러 가셨지요. 졸지에 웬 봉변인가 탄식하며  축 늘어져 있으려니 아까 확인 않고 밥상 차렸던 어시스트가 다가와 ‘저 때문에 선생님 고생 하셨죠~’ 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사과 아닌 사과를 하기에  손사래를 치며 돌려보냈지만 순간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조금 전 제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말 한 마디 없이도 부주의한 어시스트에게 충분히 경고를 하고  전혀 낭비 없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해결사 멘탈 갑의 활약이었던 것이죠. 그 날 전 이런 장면이라면 치과의사도 멋질 수 있구나 란 생각을 거의 처음으로 했습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陣容을 바꿔 殘黨을 섬멸하는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이 아니라도 그리고 비좁은 이 진료실이라도 진격의 야전 사령관이 되어 언제나 상황을 장악해야 하는 건 비슷하구나, 나날이 발전할 치료 술식 들이야 평생 동안 연마해 가야겠지만, 체어 사이드의 갖가지 돌발 상황을 능숙하게 진압할 수 있어야 진정한 치과의사겠지 등등의 생각들이 부어오는 턱에 냉찜질을 하는 제 마음속에 자리 잡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벼이삭이 패듯 말이죠. 현재의 제가 과연 알곡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가 없으니 난감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 날 비로소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저를 둘러싼 하나의 맥락으로 형체를 갖추었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부디 그날이 저만의 백로였기를!

뒤늦은 감사편지를 용서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제가 무척 좋아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속 한 구절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나는 고양이지만, 에픽테토스를 읽다가 책상위에 내팽개칠 정도의 학자 집에서 기거하는 고양이인지라 세상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고양이와는 차원이 좀 다르다.” 일반적인 고양이가 아니라는 (근거가 좀 미심쩍긴 해도) 자부심을 갖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배님이 책상에 내팽개치셨을 지도 모르는 에픽테토스는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기란 불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무위도식의 결의에 차 있었던 제가 어쩌면 천만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마터면 남부럽지 않은 학점을 이마에 붙이고 으스대며 난 이미 영글었으니 이삭 따위 팰 필요도 없다며 선배님을 아연실색하게 만들 뻔도 하였던 것입니다.

선배님과의 길지 않았던 시간을 많이많이 생각하겠습니다. 백로가 지나서는 논에 가 볼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혹시 지나시는 길이라면 들러주십시오. 康寧하시길.


오지연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