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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한인타운 흑인폭동(II)

기고

노아의 방주를 방불하는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탈 LA 차량 행렬들이 하이웨이를 가득 메웠고, 해병전우회를 중심으로 총기무장한 한인들은 집에서 각종 보급품과 무기들을 가지고 3대 대형한인 마트를 중심으로 집결하여, 군 복무시절의 계급을 형성하여 질서를 잡아가며 잘 대처를 했다. 한인들은 집집마다 구호품과 성금을 모으고 있었고, 한인타운 곳곳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옥상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전시를 방불하는 기지를 제작하고, 어디어디에 흑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즉시 대기하고있던 차량들을 출동시켜 마구 총을 쏘아 조기 진압을 했다고 한다.

단결을 호소하며 LA시내로 모이자는 아나운서의 울부짖는 목소리를 연 이틀동안 숨 죽이며 커튼 안에서 듣던 나는 드디어 LA시내 탈출을 하기로 했다. LA북부 Valley 지역에 사는 사촌언니 집으로 피신을 하기로 하고, 새벽 3시 자는 아들을 들쳐업고 차를 몰았다. 학교부근을 지나 한인타운을 들어가볼 엄두조차 나지않아 최단거리로 하이웨이진입을 시도했다. 가는 길 곳곳마다 약탈당하고 불탄 상가들이 흉칙하게 널부러져있었고, 천사의 도시 LA가 죽음의 도시로 변해있었다.


 언제 추가 폭발과 약탈이 있을지 모른다는 방송을 들으며 이제는 미련없이 미국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피난길을 택했다. 흑인폭동은 5월 3일에 끝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도 된다는 연락을 받고 LA로 돌아왔다. 너무도 궁금했던 한인타운을 일주일만에 들어가보니 너무나 처참했다. 폐허가 된 한인상가들… 주말마다 다니던 쇼핑센터들이 다 불타고 남아있지않았다. 2300개 한인 상가들이 어이없이 약탈 당하고 부서졌는데, 미국 ABC방송은 폭동의 피해자가 아닌 원인제공자로 보도를 했다고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지 이민자들의 설움을 그대로 느낄수 있었다.

당시 미국 신문에 로드니킹 사건과 함께 돈 없는 흑인을 쫓아내는 사건도 있었는데, 로드니 킹 사건은 한 줄로 써 놓고, 한국민이 흑인 쫓아낸 사건만 신문에 커다랗게 보도를 해서 백인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또 다른 한인 마켓주인은 흑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심하게 폭행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정당방위로 총을 쏘았고, 미국법원에서 정당방위로 인정을 받은바 있다. 이렇게 한인들은 수많은 위협을 무릅쓰고 이민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흑인 폭동은 서서히 진압이 되었고, 무기로 무장한 흑인들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총탄으로 불바다가 된 LA거리의 건물들은 폐허로 남게 되었고, 영문도 모른채 피해를 입는 시민들은 58명의 사망자와 2천명의 부상자, 경찰국장의 사퇴 등등 가해자 없는 피해자들만 있는 사건으로 끝이 났다.
일주일만에 학교로 돌아온 동료들은 한국인 피해를 잘 알고 있었고, 경찰 진압부실을 지적했다. 결국 미국인으로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이민자의 설움은 어찌 이것 뿐이겠는가… 다시 한번 조국의 소중함을 느꼈고, 아들은 미국 국적이지만 반드시 대한민국 해병대를 보내야겠다고 이때 결심을 했다. 학교는 예정대로 5월 졸업식을 무사히 했고 나의 6년 유학생활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미국 유학시절 죽을 고비를 3번 겪었는데, 미국 동서 횡단을 하다가 쌓인 눈에 미끄러져 언덕 나무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당시 1살인 아들은 차 뒤에서 튕겨 앞 유리창에 박혔고, 나 또한 운전석 옆에서 자다가 무방비 상태로 앞으로 박혔다. 깜깜한 밤에 길도 모른채 나선 것이 문제였지만 폭설이 내리는 일기예보를 모른채 떠난 것이 무리였다. 아찔한 것은 잠시, 나무가 부러지면 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긴박감에 911에 전화를 하고 기다리는 그 시간이 어찌나 길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고 영화의 한 장면을 내가 보는 것 같은 절절함으로 사지가 오그라들 정도이다.

마지막 3번째 죽을 고비는 아틀란타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비행기 시간에 늦어서 앞차를 추월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우리 차 옆으로 차를 바짝 붙이며 창문을 열고 총을 들이대는 것이었다. 우락부락한 흑인이 무섭게 위협을 하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욕을 하는 것이다. 순간 위협을 느껴 차를 갓길로 붙이고 한참을 발이 떨려서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행기는 이미 떠난 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렇게 죽을 고비 3번을 30대 초반에 미국에서 겪은 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당당하게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아들은 대한민국 육군 헌병으로 군 복무도 마치게 했다. 미국 시민권이지만 한국 군인으로 자진 입대를 하게 했다. 

 죽기 밖에 더하겠느냐 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그러나 죽을 경험을 한 사람은 그 말이 이해가 되지않는다. 죽음은 그 공포를 겪어본 사람 만이 알수 있다.

지금 이 시간 살아 있다는 그 자체 만으로 얼마나 감사한지…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미애
K치과병원 대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