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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 울던 날

Relay Essay 제2251번째

매년 겨울이 시작되면 너는 스마트폰의 날씨 앱(application)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겨울 날씨는 변심한 애인의 마음처럼 변화무쌍하다.
기온이 영하 7℃ 이하로 내려가면 너는 퇴근 전에 7개의 세면대 중에서 안전하다 싶은 몇 개를 골라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도록 수도꼭지 손잡이를 미세하게 조절하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는다.
‘또로로록’
‘또로록’
‘또록’
‘똑, 똑, 똑……’
물이 방울져 세면대 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굴러떨어질 때까지 수도꼭지 손잡이를 들었다 내리기를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벌써 퇴근준비를 마치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직원들은 네가 나오기만을 아까부터 간절히 기대하고, 기다리고, 또 기도하고 있다.
너는 그런 직원들의 마음에 온통 신경이 쓰인다.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면 살필수록, 너는 세면대 앞을 쉬이 떠나지 못한다.

 세면대 바닥 제일 깊은 곳에 동그란 휠 모양의 물막이 장치를 세로로 세워 놓고 물이 잘 흘러내려 가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너는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를 못한다.
‘혹시라도 물이 고여 넘치진 않을까’라며 수차례 머릿속으로 물이 내려가 하수관을 빠져나가는 시뮬레이션을 반복해본다.

이때쯤이면 광야에서 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막이 구멍은 열려있다. 물은 절대로 세면대를 넘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지나가! 이제 그만~’
시뮬레이션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세면대마다 틀어 놓은 물이 모여서 건물 외벽을 타고 내려가는 하수관에서 얼지 않도록 굵은 배관에 감겨 있는 열선장치 코드를 전원에 꽂아 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2005년 2월, 3일간의 구정 설 연휴 기간에 영하 12℃에서 영하 15℃를 오르내리는 기습적인 한파가 인천지역에 불어 닥쳤다.

보일러를 외출로 틀어놓지 않고 퇴근하는 바람에 네가 근무하는 3층에서 동파사고가 발생했다. 워낙 낡은 건물인 데다 보일러 물탱크가 찬바람이 숭숭 들이치는 외벽 가까이 있어 한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누수의 직격탄을 맞은 2층 2호실 한의원은 누수된 물이 벽의 갈라진 틈을 타고 진료실 천장으로 쏟아져 내려서 젖은 벽지들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축 처졌다. 침을 놓거나 물리 치료 시 환자들이 눕는 침대와 침대를 가리는 간이커튼이 젖어서 얼룩이 피어 있었다.

2층 1호실 사진관은 촬영 시 사용되는 배경 벽과 바닥에 깔린 카펫이 누수에 오염됐다.
마지막으로 1층 약국은 벽면과 일부 천정이 피해를 보았다.
다량의 약들이 누수 피해를 보지 않은 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누수 피해를 확인한 지 이틀째 되는 토요일 오후였다.
가장 큰 피해를 본 한의원을 다시 방문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못했고 피해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한 두 번째 방문이었다.
제법 큰 키에 단발머리를 한 여한의사가 원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손해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원장님.”

당시 한의원에는 원장실에서 함께 세미나를 마치고 나오는 한의사 동료들 몇 분이 모여 있었다.
“아니 어떻게 했길래……, 당신 때문에 우리 친구가 진료도 못 하고 이렇게 피해를 보았잖아요. 어떻게 보상해주실 거예요?”라며 너를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당신이 뭔데 상관이야. 제삼자는 옆으로 찌그러져 있지!’
그때 마음속으로 이런 말이라도 떠올릴 주변머리라도 있었다면 너는 좋았을 것이다.
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황망해 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동파사고로 인해 피해보상금액은 어림잡아도 350만 원이 훌쩍 넘었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한의원의 벽지들도 함께 울던 날, 그날 이후로도 그녀는 여러 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치과용 진료실 유니트 체어에 깨끗한 물을 공급해주는 치과용 정수 시스템 장비의 수관이 경화되어 터지면서 누수가 일어났고, 한의원 2층 천정을 지나 치과로 유입되는 수도관이 한파로 얼어붙기도 했다. 이제는 괜찮겠지 하며 동파에 대한 채비를 단단히 했을 때는 3층 외벽으로 나가는 하수관이 밤샘 추위로 얼어 터져서 2층 한의원으로 역류하기도 했다.

 반복되는 누수 피해가 힘들었는지 이제 그녀는 더는 2층 한의원을 경영하지 않는다.
그녀는 떠났고 너는 여전히 3층에 남아 강박적인 시선으로 겨울을 맞이하곤 한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지나는 대로, 너는 새로운 강박의 변주들을 연주한다.

임용철
선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협회 문인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