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箭筒에 가득한 화살

오지연의 Dental In-n-Out

어릴 적 이따금씩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엄마 선배의 아들들 얘길 해 주시곤 했다.

엄친아 두 대학생이 여름방학인데도 책상 앞에만 있자 엄마가 토마토를 썰어놓고 대청으로 불러냈다. 둘이 마주앉아 토마토를 먹는 걸 보며 흐뭇해진 엄마가 돌아앉아 빨래를 개기 시작한지 10여분 쯤 지났을까? 등 뒤에서 두런두런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토마토 즙만 남은 걸 서로 마시겠다고 아들 둘이 접시를 쥐고 옥신각신하는 소리였더란다. “공부만 했지 세 살짜리나 마찬가지라니까.”라는 한탄과는 안 어울리게 그 분의 얼굴에 가득하던 뿌듯함이 너무나 부러웠다는 것이 매번 엄마 얘기의 결론이었다.

(늠름한) 자식은 壯士의 수중의 화살이니, 전통에 화살이 가득한 복된 장사는 성문에서 원수와 말할 때에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성경말씀이 이어졌고 이내 우리 자매는 (제대로 로딩이 된 화살이라도 된 기분으로) 슬그머니 TV앞을 떠나 책상을 향하곤 했었다. 이제 와서 엄마의 훈육법을 왈가왈부 할 마음도 없거니와 토마토마냥 시큼 쌉싸름한 느낌만 남은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엔  랜덤 타임슬립 드라마처럼 기억 전체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화살이 가득찬 전통이 어디선가 날아와 내 앞에 툭 하고 떨어지듯이.

동창회 상임이사회가 학교 교수 회의실에서 있었다.  캠퍼스 뒤 편 예전엔 농구코트가 있었던 곳에 만들어진 주차장은 9월 밤의 쌀쌀함과 일과가 끝난 학교 특유의 캄캄한 고즈넉함이 적당히 뒤섞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정의 나이든 고양이가 현관에 오도카니 앉아 반가움을 짐짓 숨긴 채 애써 별 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왔어?” 하는 얼굴로 바라보듯이. 이쪽 역시 질세라 제대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지만,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털빛은 예전처럼 윤기가 있는지 곁눈질로 나마 샅샅이 살핀다.

잠시 주차장과의 눈싸움을 끝내고 회의실로 갔더니 먼저 도착하신 분들이 도시락을 드시고 계셨다. 나름 친한 선후배도 있지만 아버지뻘 되시는 대선배님도, 학장님도 와 계신다. 간혹은 ‘오빠 같은데 아닐 지도 모르는’ 낯선 얼굴도 있다. 하하. 일주일의 한복판 피곤의 정점인 수요일 저녁인데도 40여명의 동창회 임원들이 모였다. 회의록은 17쪽이나 된다. 도시락을 앞에 놓고 있을 때만 해도 아무려면 어때 하는 태평스런 표정이던 분들도 회의가 시작되면 이내 양미간을 찡그려가며 몰두하신다. 얘기가 다 끝나가나 싶을 때 쯤 의사진행발언으로 한참을 되돌아 갈 때면 회의장엔 조용한 탄식이 흐른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후에 새해가 뒤따라오듯 사뭇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사전 준비과정엔 도처에 지뢰밭이라 우여곡절이 많다. 기관장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누가 당선되든, 선거 끝나고 나서는 싸우지 마라.”는 원로선배님들의 호통에 “네 ,안 싸우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장면, 그리고 그 분들 중 어떤 분이 진짜 당선되는 장면, 또 떨어졌지만 정말로 ‘안 싸우고’ 동창회 임원으로 태연자약하게 돌아와 마이크 들고 업무보고 하는 장면, 여러 해 동안 기관장이셨다가 임기 끝나자  싱글 수트가 아닌 카프리 섬에라도 가야 할 것 같은 산뜻한 티셔츠를 입고 이사회에 오시는 장면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사업들을 준비하며 오랜 시간 함께 고군분투하는 많은 분들의 모습을 나는 여러 해 동안 목격하였다.

드디어 회의가 끝나고 아이고 이 밤중에 집에 가서 칼럼은 언제 쓰나 또 뭘 써야하나 걱정하며 주차정산을 하려는데, 정산 기계 앞에 모인 임원들이 왁자지껄 하던 얘기를 계속 하면서도 동시에 주춤주춤 뭔가 대열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기수별로 서는 건가요?” 누군가 말하자 모두 와 하고 웃었지만, 대열은 끝내 흐트러지지 않았다. 순간 그 곳에 모여 선 모든 이들이  빛나는 箭筒 속에 한가득 빽빽이 들어찬 날렵한 화살들로 보인 것은 왜일까. 저 전통을 둘러맨다면 누구든 금세 복 있는 壯士가 될 것만 같았다… 라고 쓰게 되다니, 일단 제가 첫 번째 壯士가 된 것 같군요!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