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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의 길, 다원론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

지난 번에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존재하는 것이 하나라고 함으로써 생성, 소멸, 운동, 변화하는 세계를 부정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숙제를 남깁니다. 어떻게 하면 파르메니데스가 그어 놓은 ‘있는 것은 생성, 소멸, 운동, 변화하지 않는다’란 선을 넘지 않으면서 우리 눈앞에서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설명할 것인가. 이 숙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한 철학자들을 우리는 ‘다원론자’라고 부릅니다. 존재하는 것이 생성,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놓음으로써 운동하는 세계를 구했다는 것이죠.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가 그들을 대변합니다.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원리를 상정하는 것은 이론의 효율성이나 정합성의 측면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선택임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족보를 뒤져 최초의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듯이, 만물이 발생한 최초의 지점을 찾아 그것을 기원이자 원리로 삼았던 초기 그리스 자연철학의 생각은 그만큼 또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시초가 되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환원주의적 설명방식이 갖는 매력도 큽니다. 사실 어떤 학문이든 잡다한 세상의 다양함을 원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으니, 일원론은 그 욕구의 최상위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군만을 조상으로 삼으면 획일적인 사회를 조장하게 되듯이, 일원론은 설명대상을 너무 단순화할 수 있는 문제점도 잠재적으로 갖습니다.

반면에 원리를 둘 이상으로 설정하는 다원론은 이 원리들이 따르는 또 다른 원리들을 설정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 엠페도클레스는 본래 존재하는 것을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개의 뿌리들(rhizomata)로 봤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탈레스의 물처럼 자체 내에 운동의 원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므로 이것들이 합쳐지거나 분리되는 별도의 원리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엠페도클레스는 사랑(philotes)과 불화(neikos)라고 놓았습니다. 이렇게 다원론으로 가게 되면 사건을 복잡하게 이해하게 되고,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관점에서 문제를 보게 됩니다. 또한 각각의 것들을 동등한 자격으로 보는 것이 다원론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으로 대변되는 4가지 성질을 “같은 때에 태어난 동기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다원론자 아낙사고라스는 삼라만상 각각의 성질들 모두를 다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성질들이 일종의 씨앗(sperma)으로 있지만 그 비율들이 각기 달라 우리에게는 이러저러한 특정한 성질의 것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성질들이 다 똑같이 균등하다는 생각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다원론이 새로 가져온 관점은 현상(appearance)과 실재(reality)의 구분입니다. 진정으로 있는 것은 생성, 소멸, 운동, 변화하지 않는 파르메니데스식의 존재여야하기 때문에 세계내의 운동과 변화 등은 모두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불과하게 됩니다.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는 4뿌리나 아낙사고라스의 씨앗은 모두 특정한 성질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 자체가 어떤 성질은 아니고 그것들이 이루는 비율이나 양의 정도가 우리에게 성질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근원적인 의미에서 성질의 차이를 인정했지만, 원자론의 시조 데모크리토스는 이마저도 거부합니다. 그에게 근원적으로 있는 것은 오로지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원자들의 크기와 모양입니다. 원자들이 서로의 모양에 맞춰 결합되고 분리되며, 그 크기와 모양에 따라 우리 감각기관과 접촉해 성질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자로서 최소한의 차이만을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우리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차이의 강조가 차별을 낳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것을 데모크리토스도 알았나 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주일
현재 정암학당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및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강사
저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선집>(공역),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I.II>(공역) 등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