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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린다 고로 재활용한다”

재활용 아티스트 고연진 노벨치과의원 원장


재활용 포스터, 빈 상자가 ‘나의 캔버스’
교육 안 받았지만 치의미전 입상 실력파


예술의 영역에서 오브제(objet)는 예술의 객체이면서 동시에 주체로 형상화된다. 예술가는 오브제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관객에게 ‘훅’ 던진다. 

사실 치과 현장에도 오브제라고 할 것들이 넘쳐난다. 어떤 영화에서는 “화투를 아트(art)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운운하기도 하지만, 실제 치과 술기가 ‘art’로 자주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치의학은 기술이면서 동시에 예술이기도 하고, 빗대자면 치과 안에서 온갖 것들이 기술과 예술의 오브제가 될 수도 있다.
여기 치과에서 버려지는 각종 ‘쓰레기’를 오브제로 그림 그리는 화가가 있다. 손재주가 남다른 치과의사들이 핸드피스 대신에 붓을 잡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버려진 포스터라든가 박스 따위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고연진 원장(노벨치과의원)이다.

# 오늘도 희망을 그립니다

“우연치 않게 치과에서 나오는 액자형 포스터에 그림을 그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그려보니 너무 그럴싸한 거예요. 표구가 돼 있기 때문에 정말 액자 그림 같은 느낌도 들고, 쓰레기로 버려질 포스터에 새 생명을 불어 넣었다는 뿌듯함도 있고요. 저는 또 언제 포스터가 나오나 눈독 들이고 있고, 남편(고 원장은 부부치과를 운영한다)은 ‘이건 남겨놔야 해’라며 버티는 상황입니다.”




실제 고 원장의 자택에는 버려진 치과용 포스터, 포장용 나무 박스 등 각종 재활용품에 그가 그린 그림들이 복도와 방에 전시돼 있다. 말하자면 그의 집은 재활용 아티스트의 ‘리사이클 아틀리에’인 셈이다.

그 중 대표작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은 ‘코끼리 연작’. 커다란 상아를 가진 코끼리가 눈을 감고 마치 명상을 하고 있는 듯한 이 연작은 배경과 심상을 조금씩 달리해 여러 작품으로 그렸다. 그중 한 작품은 ‘상념’이라는 제목으로 2016년 치의미전에 출품, 상을 받기도 했다.

“언론 보도에서 나온 코끼리를 보다가 코끼리의 표정에서 슬픔을 느꼈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 오묘하게 저도 그렇고, 코끼리의 표정도 그렇고 평온해 지는 것을 깨달았어요. 처음의 소재는 슬픔이었지만, 그림이 나아가는 방향은 평온과 희망이었던 거죠.”

그래서 요새 고연진 원장의 테마는 ‘희망’이다. 최근에 치과용 포스터에 그린 물고기 연작 두 점은 그가 생각하는 지향성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진한 파란색 바탕에 물고기가 우측 상단을 향해 헤엄치는 모습을 담은 물고기 연작은 명징하게 생명력과 희망을 담아내고 있다. 통상 서양 미술에서 푸른색은 작가의 우울(피카소의 ‘청색시대’ 등)을 상징하지만, 고 원장은 희망의 색깔로 사용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우울의 표현이라든가 그에 대한 힐링이 아니라 희망을 표출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약간 템퍼(temper)가 있기는 하지만, 그림 만큼은 밝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밝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고연진 원장은 정식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자력갱생형’ 아마추어 화가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린 지도 2년 정도 밖에 안 됐다. 내원하는 환자 중 화가가 있어 한달 정도 그림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지만, 이런 저런 개입이 싫어서 그것도 곧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림은 그냥 자기를 그리는 것이지, 남이 수정해 주고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그때 확고해졌다고 한다. 고 원장은 “Just paint it. 그림은 그냥 자유롭게 그리는 거지 타인에게 배우는 게 아닌 거 같다”고 덧붙였다. 

# “상 받았다면 화가가 됐을지도…”

그는 그의 변곡점이 초등학교 고학년쯤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판단한 담임선생님이 사생대회에 참가시켰는데, 어린 나이에도 수상에 대한 부담감이 그를 짓눌렀다고 했다. 결국 몇 번 고배를 마시고, 그는 이른 나이에 ‘붓을 꺾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나갔던 사생대회를 준비하면서 ‘꼭 상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결국 그 대회에서도 상을 못 받았는데, 만약에 상을 받고 더 큰 용기를 얻었다면 아마 미술 쪽으로 나갈 수도 있었겠죠. 그림 그리는 아이들한테는 모두 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앞으로의 포부를 묻는 질문에 수줍게 ‘재활용 아티스트’가 되는 거라고 답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식인이라면 환경에 대한 책임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열심히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다니고, 더 다양한 오브제에 그림을 그릴 거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갑자기 걸려온 전화. 치과의사로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못한 것이 내심 아쉬웠던 모양이다.

“음... 고민을 좀 해봤는데요, 제가 코끼리를 그리고 유기된 고양이를 그리고, 물고기를 그리는 것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는 거 같아요.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치과의사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것만큼 치료를 하면서 사람(환자)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것 그게 비슷한 점이겠죠.”

치과에서 수명을 다한 포스터가 있으면 고연진 원장에게 보내길 바란다. 버려질 포스터는 그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획득하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