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5월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었다. 시인은 이런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하였는데, 필자는 특별한 두 분과 함께 치의학을 찾아서 7박 9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목적지는 3곳이었고 모두 치의학 박물관이었다. 첫 번째 장소는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Maryland)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Dr. Samuel D. Harris National Museum of Dentistry, 그 다음에 찾아간 곳은 미국 중북부에 있는 미시간주(Michigan) 앤아버(Ann Arbor)의 Sindecuse Museum of Dentistry, 여행의 마지막 대미는 미국 중동부 오하이오주(Ohio)의 작은 시골 마을 베인브릿지(Bainbridge)에 있는 Dr. John Harris Dental Museum이었다. 볼티모어의 메릴랜드 치과대학에 있는 치의학 박물관은 2008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국 소아치과학회를 참석하는 동안 첫 방문이 이루어졌다. 호기심 차원에서 들렀던 치의학 박물관은 필자에게 새로운 지평을 안내하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치과박물관’과 ‘치과의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치의학
치과의사 Painless Parker는 patient advocate인가, 아니면 outlaw dentist인가? 과연 그의 치과 개원 전략은 환자의 권익을 위해 합리적인 비용의 진료를 제공한 환자의 대변인인가, 아니면 호객 행위와 과대광고를 일삼으며 치과의사의 품격을 훼손한 비윤리적인 치과의사인가? 20세기 미국 사회에 던져진 이 물음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필자는 이 물음에 직접 답하기 보다는 Painless Parker의 일대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그의 본명은 Edgar Randolph Parker(1872-1952)이고 캐나다 New Brunswick주에서 태어나, 18세에 2년 과정의 미국 Philadelphia Dental College에 입학하여 1892년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파커는 캐나다로 돌아가 개원을 하였으나 6주동안 환자가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을 경험하며 첫 개원에서 실패의 쓰라림을 맛봤다. 그래서 파커는 사기에 가까운 뛰어난 상술로 성공한 바넘(Barnum) 서커스단과 치과를 융합하여 Street Dentist로의 변신을 시도하였다.파커는 마차에 치과진료대를 싣고 전국을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