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협회 역사가 100주년을 맞이한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백수(白壽)다. 오랜 역사다. 이제 치과계는 다시 한번 강건하게 용트림할 때다. 지금이라도 그 준비를 차근히 세워나갈 때이기도 하다. 새로운 백년의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이 시점에서 한가하게 사극에서나 봄직한 나이 든 양반 나부랑이처럼 주변 잡다한 일들을 다 간섭하며 웨죽걸음 할 때가 아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각 시도 치과의사회의 총회가 열렸고 이제 치협의 대의원총회만 남겨두고 모두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도 총회를 살펴보니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각 시도 치과의사회의 뉴스를 보다보면 언제나 각 지역마다 자신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고 풀어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기에 항상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단지 우리 치과계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광의의 주제들이 별로 없다는 점에 아쉬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나마 올해 각 시도치과의사회 총회가 조금 남다른 것은 부산, 대구, 충남 등 국립치의학연구원을 유치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뜨거운 유치경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슈적인 안건 말고는 서울 등 일부 치
협회에서 인정한 대한치과의사협회 창립 100주년 행사가 내년 4월 11일부터 사흘간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작년 5월에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한국인 최초 치과의사 면허 1호인 함석태 선생이 1914년 6월 19일 개원을 하고, 당시 일제 강점기였지만 조선 땅 최초의 치과의사회인 조선치과의사회가 일본 치과의사와 함께 1921년 10월 2일 창립되었다. 그 이후 60여년만인 1981년 제30차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창립 기념일 제정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집행부에 구체적인 날짜 결정을 위임하고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하지만 2020년 11월경 치협 창립일을 앞두고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쟁점은 1981년 경주에서 개최된 대의원총회 기존 의결대로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주축이 돼 조선치과의사회를 창립한 1921년을 100주년으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조선인 치과의사 7인이 중심이 되어 1925년에 창립한 한성치과의사회를 새로운 기원으로 삼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있었다. 당시 치협 협회사 편찬위원장을 역임한 변영남 위원장은 기존 1921년을 창립 기념일로 지정한 이유는 조선치과의사회는
용궁을 다녀왔다. 숨차고 가래 끓는 증상이 롱코비드 기관지염 때문인가 해서, 진해거담제로 3개월을 버티던 중이었다. 정기검진 받고 오던 중 호흡곤란으로 서울역 계단에서 쓰러져, 휠체어-KTX-휠체어-119 순서로 충남대병원 응급실에 이르렀다. 호흡기 걸고 40시간, 내과중환자실 사흘, 폐부종의 원인으로 의심되는 심장 약 후유증 문제 분석을 위하여 심장중환자실 나흘, 도합 9일 만에 퇴원하였다. 전에는 하나뿐이던 중환자실(Intensive Care Unit)은 응급·심장·신경의 3개 ICU로 진화되어 있었고, 교수·간호사 모두 과로로 탈진(Burnout) 상태였다. 필자가 충남대 병원에 근무하던 70년대 말 이래 전문과 숫자는 3배가 늘고 세부전공이 분화하여, 영상의학과·내과 수술 또는 시술(施術)이라는 다양한 진료형태가 생겨나 일반화 하였다. 치의신보에 ‘피안성과 정재영’이라는 A4 5장 분량의 칼럼을 쓴 것이 2010년 4월인데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의료대란이 국가적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칼럼 내용은 ‘통합치과’ 인정을 촉구하는 목적이었지만, 의료계 인기 과가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에서 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로 확대되는 시점에, 생명을 다루는 필수
오래전 어느 설탕회사의 설립 초기에 있었던 일화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어렵게 사업허가를 받고 차관을 얻어 기계를 사고 기술도입계약을 맺어 공장을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대망의 시운전을 하는데, 기계에서는 나와야 할 설탕이 아닌 원당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이다. 몇 번을 다시 기계를 돌려봐도 똑같았다. 공정을 점검하고 기계를 뜯어봐도 문제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골머리를 앓던 차에, 지나가던 현장의 다른 직원이 무심하게 던진 ‘원료를 왜 저렇게 많이 넣지?’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고 한다. 욕심이 지나쳐 생산설비가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서는 원료를 들이부은 탓에 제대로 완성품이 나오지 못한 것이다. 다시 기계와 매뉴얼을 확인하고 적정량의 원료를 넣자 비로소 새하얀 설탕이 제대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설탕이 귀한 대접을 받던 오래전 이야기건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첫째로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공로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닐터이다. 국내 최초로 도입된 기계 조작에 능숙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몇달이나 여러 사람이 매달려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을 보면 기술
인공지능(AI)은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70년의 역사가 있고, 크게 4번의 주요 흐름을 거쳤다. 1)초기 연구(1950년대-1970년대). 1956년 다트머스 회의에서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고, 앨런 튜링의 튜링 테스트를 통해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논리적 추론에 기반한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이 개발되었으며, 게임 플레이, 자연어 처리, 증명 등 특정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일반적인 지능을 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2)침체기(1970년대-1980년대). 초기 AI 연구의 한계와 높은 기대에 대한 실망으로 AI 연구에 대한 투자가 감소했으며, AI 연구는 전문가 시스템, 퍼지 논리, 신경망 등 특정 분야에 집중되었고, 컴퓨팅 성능 향상과 알고리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 지능을 구현하는 데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다. 3)부활(1990년대-2010년대). 딥러닝 기술 발전과 컴퓨팅 성능 향상으로 AI 연구가 재활기를 띠었고, 이미지 인식, 음성 인식, 기계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딥러닝 기반 AI 모델이 성공을 거두고, 빅데이터 등장으로 AI 모델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확보
20년 후 나는 81세이다. 61세인 박병기가 81세인 박병기에게 편지를 써본다. 지금 내가 꿈꾸는 것이 이루어졌는가? 결과가 궁금하다. 81세인 박병기가 61세인 박병기에게 편지를 쓴다. 61세의 꾸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묻는다.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아님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하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격려할 것인가? ‘퓨처 셀프’를 접하는 것은 페이스북에 올라온 광고를 통해서이다. 저자 벤저민 하디는 조직심리학자로 자기계발 분야 파워블로거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미래의 나를 적용하는 과학 분야에서 전문가다. 현재 <The Daily Upgrade>라는 팟캐스트를 통해 미래의 자신을 명확하게 하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정기적으로 삶의 방식을 도약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20년 후의 내가 다시 돌아와 남은 오늘을 산다면 어떤 기분일까? 미래의 나는 다시 살게 된 오늘 무슨 일을 할까?’(퓨처 셀프) 1995년 나보다 4살 어린 남동생이 설 명절을 보내고 직장으로 돌아가다 고속도로 사고로 운명을 달리 했다. 동생이 죽고 나서 누나들(둘째, 셋째 누나) 꿈
우연히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헤어지면서 “언제 밥 한번 밥 먹자”라고 하는 것은 부담 없이 주고받는 통상적인 인사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식사 자리를 같이하자고 하는 것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동안 못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서로 즐거운 시간을 갖자는 선의의 뜻이다. 모임이 정해지고 식사하게 된다면 누가 밥값을 내느냐는 서로 말은 안 하지만 언제나 신경 쓰이는 일이다. 정치인, 경찰, 기자가 함께 밥을 먹었다면 밥값은 과연 누가 낼까? 돈이 많은 사람? 힘이 있는 사람? 윗사람? 승진하거나 좋은 일이 있는 사람? 아니다! 정답은 ‘식당 주인이 낸다’라는 썰렁한 아재 개그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과 만나 식사할 일이 많이 생기는데 대게는 힘없는 사람, 잘 보여야 하는 사람, 부탁할 일이 있는 사람, 아랫사람이나 약점이 있는 사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밥값을 내고 힘이 있거나 윗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은 밥값을 내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사람들과 따로 볼 시간을 얻기 힘드니 밥 먹는 시간이라도 기회를 잡아 대접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밥값을 내도 좋다는 것이다. 내게 밥을 사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게 물질적이든, 정신
십여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의료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자랑했던 한국, 이제 그동안 어찌어찌 덮고 끌고 왔던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미국의 높은 의료비, 서유럽의 긴 대기 시간에 비해 저렴하고 빠른 진료가 가능했던 이면에는 국민, 의사, 공무원의 도덕적 해이를 틈탄 의료이용량 폭증, 비급여의 폭풍 성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아과 오픈런, 필수과 붕괴(응급 중증질환), 지역의료 붕괴가 현실로 나타나자 의료현장의 심각성에 다급해진 정부는 타개책으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발표했다. 주지 하다시피 ▲의료 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 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체계 공정성 제고다. 그럴 듯 해보이고 적절한 해법으로 보이나 디테일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느 하나 간단치 않은 정책을 해외 여행 비행기 시간에 쫓겨서 여행 준비물을 슈트케이스에 부랴부랴 쑤셔 넣는 것처럼 치밀하지도 정리되지도 않은 미봉책이다. 포퓰리즘에 취약한 국민 여론을 활용해 공교롭게도 총선을 앞두고 전격 공표했다. 지난 26년 동안 누적돼 왔던 정책 실패에 대한 한 가지 확실한 2000명 의대 증원 정책은 이 또한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가?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한다. 세밀
1992년 “2000년대 치과계를 위한 제언”에서 “신년에 계획을 세우고도 아무 결실도 얻지 못한 채 오히려 뒷걸음치며 가는 치과계를 보면 2000년대를 예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기도 하지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줏대가 없는 집안은 안팎에서 흔들어대는 사람도 많고 불평도 많아지고 궂은 일도 많이 생긴다고 하는데, 수립된 안(案)이 최선책이 아니더라도 대안도 없는 반대를 하지 말고, 일의 공백을 줄이고 작은 일이라도 성사시켜가며 일하는 재미와 보람을 갖자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한 원로분이 “입안의 치아처럼 함께 하는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았었다. 각 치아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도 각각의 기능을 가지고 조화를 맞추고 있는데, 이 사회에는 갈등을 만들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들에게는 필자가 말하려는 것도 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일을 잘하기 위하여서는 서로를 알고 이해해야하는데 그 기본은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소통을 잘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소통의 기본은 경청(傾聽)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아도 네가 왜 그러는지 다 알아”라고 확실하지 않은 것을 성급하게 미리 자
1997년 대한민국이 IMF 외환위기가 왔을 때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국민들의 뇌리속에 “IMF” 라는 단어가 각인 되었듯이 이제 임플란트 라는 단어는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민적인 용어가 되었다. 임플란트 라는 용어가 등장 할때만 해도 신기하고 치과계 블루오션으로 자리잡을 거라는 기대감이 많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임플란트가 대중화 되기 시작한지 2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마디로 레드오션이 되어버렸다. 초창기에는 임플란트 수술을 할 수 있는 치의가 많지 않고 국산보다 외산들이 앞장서서 임플란트를 선도하다 보니 수가 면에서나 비싼 명품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임플란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생겨나고 국산 임플란트 제품수준도 향상되면서 수가 하락은 자연스럽게 조정이 되는 국면이 되었다. 1개당 식립시 2~300만원 하던 게 10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박근혜정부(2013년~2017년) 시기에 그 정도 형성된 일반수가에서 2014년 7월 만 75세 이상부터 적용한 보험 임플란트가 총진료비 120만원으로 책정하였으며 본인 부담률이 50% 였다. 그리고 201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김일성의 ‘폭풍작전’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해낸 신의 한 수다. 공산 독재냐 자유 민주냐 개념조차 생소한 국민에게, 최소한 꼭 지켜야 할 ‘내 것’을 쥐여 준 것이다. 일찍이 레닌은, “농민은 땅에 대한 집착으로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 적당히 이용하고 버려라”하지 않았던가? 충청도는 다른 곡창지대와 달리 지주·소작농관계보다 자작농이 더 많았다. 소작농은 당장 눈앞의 마름 눈에 들어야지, 뼈 빠지게 일하는 건 한양에 계신 지주의 배나 불리는 일이다. 흉년이 들면 지주는 곳간을 풀어 소작농의 생계를 도와준다. 일종의 농기구(農器具) 관리다. 직업이라는 개념에서 ‘도덕적 해이’가 기생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다. 자작농은 다르다. 쌀 한 톨 한 톨이 내 재산이니 피땀을 쏟는다.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낸다. “검은 구름이 몰리는 걸 보닝께 오늘 니얄 한 줄금 허것는 디?” “예끼, 이 사람아.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누가 안 디야?” 6·25 전쟁 중에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명장은 임부택 소장이다(1919-2001). 장군의 7연대는 개전 첫날부터 춘천·홍천 지구에서 북괴군 2개 사단을 괴멸시키며 유일하게 3일을 버텨, 국군은 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