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가방에서 기타 줄을 꺼내는데 같이 들어있던 보라색 기타 피크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명 떨어지는 곳을 봤는데, 어딨는지 안 보인다. 주변 물품들을 이리저리 훑어봐도 그 피크는 보이지 않는다. 가구 바닥 밑으로 들어갔나? 더 자세히 주변을 훑었다. 그래도 안 보인다. 그 작은 피크에 오기가 생긴다. 내가 분명히 봤는데… 그때 밖에서 나를 부른다. 바로 나가봐야 하는 데 쓸데없는 집착…피크를 찾고 그 부름에 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지니 그 피크는 더 안 보이는 것 같았다. 순간 중요한 것, 해야만 하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밖으로 나갔다.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일을 끝내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니 그렇게 안 보이던 그 보라색 피크가 작은 실내용 전기히터 받침 위에 놓여 있다. 너무 잘 보였다. 아까는 왜 그리 안 보였을까. 바로 눈앞에 있었구나. … 세 가지 말씀이 떠올랐다. ‘중요한(소중한) 것을 선택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된다.’ ‘마음이 급해지면 시야가 좁아진다.’ - 문제를 만나면 잠시 한 발짝 물러나 다시 그 문제를 밖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보석 같은 진리도, 그리고 내가 아껴야 할 사람들도 바로 내 가까이에 있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도시 한복판, 빽빽한 빌딩 사이에서 한숨을 쉬어본다. 두툼한 마스크 때문인지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5년 전 영등포에 개설되어 중증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치과진료를 하고 있는 스마일재단의 장애인치과센터 ‘더스마일치과’가 이전을 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한 장애인단체에서 무상으로 임대를 하였던 공간이었는데 슬프게도 갑작스럽게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개원을 준비하는 보통의 치과의사들이라면 지역 인구와 유동성, 홍보 효과 등을 우선적으로 확인하겠지만 나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장애인치과를 개설하기 위해 많은 고려사항이 있지만 그중 가장 난감한 것은 장애인 편의시설이다. 먼저 계단 혹은 턱을 지나야 진입이 되는 건물은 제외다.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전동휠체어가 진입하지 못하는 소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건물도 탈락이다. 주차가 공간이 없고, 진입로가 좁아 휠체어가 지나가기 어려운 곳들도 곤란하다. 장애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중교통인 지하철역에서 조금 멀더라도 도보가 가능해야 한다. 휠체어 장애인이 진입할 수 있는 구조와 규모를 가진 화장실을 가지고 있는 건물도 매우 드물다. 간혹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 있는 건물도 현장
많은 사진가들이 자신이 기록하고 싶은 피조물들을 현실 생활로 부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최대한 많이 담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그것을 왜 담았는지 그 의미조차 잊어버리고 구경거리들만 남기곤 한다. 이차원 공간에 담아 놓은 구경거리들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들은 나에게 과거의 나로부터 미래의 참나를 향한 통로가 될 수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사진 작업을 하는가?’ 이것은 수없이 많이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던 화두였다. 나는 치의학 분야의 구강악안면외과 전문의로서, 지난 수십 년간 국내외 다양한 학술모임에서 결손된 조직들의 치유 반응 기전, 수복재료 및 치료방법들을 발표하며 임상에 임해 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촬영한 사진 작품들을 통해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도 치유해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참가해 보았던 사진치유 워크숍들은 거의 모두 촬영의 결과물보다는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로 치료를 하고 있어 원래 내 기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던 중 최근에 갑자기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해온 사진 작업들에 의해서 남들이 치유되기 이전에, 사진 작업을 하면서 나 자신이 치유되
유년 시절, 여느 아이들처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우연히 피아노 학원을 방문한 것이 나의 피아노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와 80년대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클래식 음악, 특히 피아노 교육이 대중화되었다. 1980년대는 동네마다 피아노 학원이 생겨났던 시절이었다. 피아노는 클래식 악기 중 음량이 큰 편이고, 방음에 대한 개념이 약했던 시절이었기에 피아노 학원 근처는 피아노 선율이 크게 울려 퍼졌다. 특히, 오가다 들은 쇼팽의 피아노 선율은 참 아름다웠다. 은연중 피아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나는 클래식 음악과 첫 조우를 했다. 집에서도 한 번씩 연습하라고 할아버지가 사 주신 흰색 업라이트 피아노는 나와 우리 가족의 구심점이었다. 거실 한 켠에 자리 잡은 피아노의 덩치가 크기도 했지만, 가족을 한자리에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생과 옆에 나란히 앉아서 젓가락 행진곡을 신나게 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피아노곡의 변주도 시도해보았고, 작곡도 해 본 기억이 난다. 운 좋게도 학창시절 내내 학급의 반주자로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늘 음악시간 전에는 어떻게 하면 더 잘 반주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었다. 또, 피아
동심은 어린아이의 마음, 순진한 마음을 뜻한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나쁜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순진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함’이라는 부정적인 뜻이 있다. 그렇다면,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는 아이의 마음이 동심인가? 이런 관념의 틀 안에서는 세상을 빨리 알아가는 요즘 세대의 아이들은 동심이 조기에 없어진다고 봐야 할까? 2016년 3월에 태어난 첫째 딸은 이제 제법 대화가 통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의 단계로 보자면, 직관적·상징적 사고가 가능한 전조작기(preoperational stage)에 해당되어 언어를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해하며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단계가 되었다. 행복, 무서움, 사랑, 죽음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말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고, 가정에 충실할 수 있는 군의관 시절의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느 초보 아빠처럼 다소 수동적으로 놀고 동화책 읽어 주기만 하다가, 아이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의외의 것이었다. 신데렐라 놀이를 하다가 문득 “아빠 죽는 게 뭐야?”는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헤어져서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거야”라고
오타쿠. 일본어로 お宅(おたく)라고 쓴다. 외출은 하지 않고 집(宅)에만 틀어박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를 부르는 신조어였다. 일본어의 높임말 접두사 ‘오(お)’자가 붙어 있지만 가상세계에 푹 빠져서 생활하는 외톨이를 비하하는 호칭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오타쿠의 의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집에만 박혀 있는 외톨이’를 넘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취미에 몰두하여 일가를 이룬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기성세대는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오타쿠들의 세계가 열리고 있다. 아니, 이미 열려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통신문명의 기기들의 출현으로 급격하게 증식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 어마어마한 의미의 세계다. 그리고 오타쿠적 성향의 인재들이 이를 주도한다. 오타쿠. 가상세계를 개척하고 선도하는 전위병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유사 이래 인류는 혈통으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 잣대를 혈통에서 금력으로 전환시킨 일대사건이 발생하였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이었다. 유럽인의 관점에서는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불렀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소식이
뒤늦은 나이에 결혼해 이제 3년 남짓,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이제 곧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그 동안 두 딸의 엄마에서 두 딸과 세 아이의, 이제 곧 네 아이의 할머니가 되는 우리 엄마도 내가 아내와 엄마, 며느리가 되는 동안 ‘엄마’에서 ‘친정엄마’로 신분이 하향 조정되었다. 친정엄마는 월급날이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한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족들 건강상태를 나누다 보면 그 다음은 항상 “고맙다”로 끝이 난다. “용돈을 보내줘서 고맙다”, “신경 써줘서 고맙다.” ‘키워줘서 감사하다, 내 엄마가 되어줘서 고맙다’ 나는 지금껏 제대로 얘기해본 적이 없는데 엄마는 늘 조금은 쑥스럽게, 그리고 조금은 촉촉하게 그렇게 얘기한다. 어버이날이 되고 본인 생일이 되어 용돈이라도 조금 챙겨드리는 때면, 이번에는 사위에게 전화해 “뭘 이렇게 많이 주었냐, 고맙다, 잘 쓰겠다” 감사를 전하신다. “당당히 받아라, 고맙다는 말 하지 마라, 당연히 엄마가 누려야 하는 거다, 내 돈 벌어 내가 주는 용돈이니 누구에게도 고맙다, 미안하다 하지 마라” 그렇게 누누이 당부해도 그때는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으마’ 약속하고서도 다음이 되면 또 똑같이 “고맙다, 미안하다”고 얘기
저는 캐나다 정 중앙에 위치한 매니토바 주의 주도인 위니펙에 살고 있습니다. 직업은 원주민 마을 중 하나인 노르웨이 하우스라는 곳에서 치과의사로 일을 합니다. 이 글에서 저는 저의 직업의 장단점을 가볍게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저는 캐나다 정부와 계약을 하고 원주민 마을에 가서 진료를 합니다. 특히 매니토바 주에는 상당히 많은 원주민 마을이 도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오직 비행기로만 교통이 가능한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의사, 간호사, 치과의사, 정신건강상담사, 물리치료사, 기타 등등, 마을의 크기와 요구 수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보내집니다. 치과클리닉은 마을 수, 인구 수에 맞게 한달에 2~4주 정도 열립니다. 치과의사는 월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원주민 마을로 들어가서 금요일에 나옵니다. 비행시간은 마을마다 다르고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되고. 작은 마을의 경우 하루에 한 번 비행기가 다닙니다. 치과의사는 자신이 일하고 싶은 날짜를 계약할 때 제출합니다. 일하는 날짜에는 의무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습니다. 즉, 쉬고 싶은 만큼 쉴 수 있습니다. 수입은 자신이 일하는 날짜 수에 따라 계산됩니다. 이
요즘 안타깝게도 전세계를 휘어 삼킨 코로나라는 단어 외에,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제일 핫한 키워드를 꼽으라면, ‘꼰대’라는 단어는 분명히 Top 5 안에 들어갈 단어일 것이다. 분명, 꽤 오래전 적어도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도 있었던 단어이고, 예전 소설, 드라마에서도 쓰였던 단어이지만, 요새처럼 언론에 회자되고, SNS에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 의미도, 분명 과거에 어쩔 수 없이 권위적이고, 강압적일 수밖에 없는 선생님을 지칭하는 것에서 벗어나, 요새는 회사 상사, 친한 선배라도, “라떼는 말이야(나때는 말이야)”를 입에 올리는 순간, 그 사람은 좋은 상사, 훌륭한 선배임과 동시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되어버리고 만다. 분명, 세대간 갈등은 예전에도 있어왔고 ‘요즘 어린 애들 버릇없어’라는 표현은 고대 이집트 문서의 기록에도 나온다고 하지만, 적어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지난 40년간, 요즘만큼 세대간 갈등이 심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세태를 그냥 무시하고 살던 대로 살 수도 있지만, 당장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의료인들이 병원, 의원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나를 알게 모르게 꼰대 취급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막내아들이 결혼식 청첩장을 준비하면서 반드시 초청해야 할 하객들의 수를 알려 달라고 했다. 일단 친척들과 친한 친구들을 염두에 두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일로 인연이 맺어진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고 나조차도 놀라웠다.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전화번호를 입력해 두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누구인지 연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여서 이번 기회에 삭제해 버렸다. 지금까지 불필요한 일과 소중하지 않은 상대에게 많은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과 내 가족을 먼저 챙기며 살아야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를 옭아매어온 쓰잘 데 없어 보이는 인간관계를 없애버려야 여생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의 무게도 줄어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아야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북치고, 장구치고, 꽹과리 치고, 추임새도 넣어가며 신명나게 놀다보면 내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알아서 내가 만들어 놓은 마당에 들어와 함께 놀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
나는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인 외과의사 조부님과 역시 서울대 의대 출신인 이비인후과 아버지를 이어 서울대 3대 의료인으로서 내 나이 4세 전후부터 의료인은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런데 피를 보면 현기증이 생기는 선천적인 이유 때문에 어머니의 권유로 피를 보지 않는 유일한 의료인인 교정과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외동딸이 존스홉킨스 대학 보건학과를 거쳐 뉴욕대 치대를 졸업하고 치과의사가 되어 4대째 의료인으로서 100년 의료가업을 잇고 있다. 나는 거의 40년 가까이 의료인으로서 살아오면서 의료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지냈던 적도 있었고 의료인의 한계를 깨닫고 절망하기도 했다. 지금은 의료인으로서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의료계 동료이자 후배들에게 나의 의료 인생을 통해 깨달은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나누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한국의 근현대 역사를 볼 때 조부님은 빈민국에서 자라셨고 아버지는 후진국에서 자라셨으며 나는 개발도상국에서 자랐고 나의 외동딸은 선진국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의료 현장에 계실 때는 의료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다른 직업군에 비해 비교적 여유로웠다.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