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님으로부터 수필을 요청받았다. 지금은 병원을 접고 다른 사업을 하고 있는데, 치의신보에 어떤 글을 적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어쩌다가 수락하게 되었고 대체 뭘 써야 하나 고민 고민하다 가이드 연자 경험을 담아 가이드 임플란트와 성공적인 개원의 연관성에 대해서 글을 쓰면 조금이나마 이 글을 읽으시는 원장님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가이드 임플란트에 대해 글을 써 본다. 나는 기본 드릴링이 100rpm으로 베타테스트 시절부터 가이드 OP를 시작했다. 공돌이라 그런지 가이드를 이용한 OP에 조금 일찍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7년 인수개원을 하게 되었는데, 한때 망해서 덴포토에 겨우 수 천 만원의 인수가에 수 개월간 올라왔던 이력이 있던 치과라 성공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평소 병원의 성공은 바로 차별화에 있다고 생각해 왔던 만큼, 우리 병원의 차별화를 위해 난 가이드 임플란트를 택했다. 가이드를 이용한 OP에 숙달되면 특이한 건이 아니면 개당 평균적으로 5분 안에 끝낼 수가 있고 뼈가 충분하게 있는 경우 개당 평균 2분 정도에 OP를 끝낼 수 있다. 물론 운동장 뼈라면 어느 술자나 2, 3분안에 끝낼 수 있지만 가이드를 이용
최근 치과포털사이트에는 “내 나이에 이 정도 어때요?” 라는 글들이 자주 올라온다. 본인 나이에 가지고 있는 재산을 나열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고 본인의 현재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의도로 쓴 글들이다. 치과의사로서 남들과의 비교는 이처럼 졸업하고 난 뒤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비교로 점철돼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옆집 친구들의 비교대상이 되어 각종 학원을 다녀야하고, 학교에서도 동급생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나만의 개성은 단단히 숨겨야 한다. 대학교도 나이에 맞게 늦게 가면 주위의 편견 때문에 피곤해지고, 군대도 비슷한 나이에 가야 한다. 직장도 결혼도 남들처럼 비슷한 나이에 하지 않으면 어른들은 한마디씩 건넨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하고 모나지 않아야 하고 비슷한 환경 속에서 또 아이를 낳아 나처럼 똑같이 기른다. 이것이 요즘 우리 인생이다. 인생에서 나만의 게임이란 것이 없어진지 오래다. 요즘 들어 “하나뿐인 인생 과연 나는 나만의 게임을 인생에서 즐기고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도 역시 “아이들을 교육의 장으로 내몰고 나 스스로도 동기들과 비교하며 살고
항상 그대로 인듯한 산은 흘러가고 산에 기대어 사는 풀과 나무와 곤충도 다 흘러가듯이 제가 경험한 교정도 여러 면에서 많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교정치료의 대상이 100만 명 이상에서 25만 명으로 줄고 있고 30세 미만에서 주로 하던 교정치료의 연령이 60대까지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정치료의 대상과 연령에 큰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치료의 질에서도 high canine이 내려와 제자리에 가기만 해도, 작은 선물이라도 사오면서 감사해하던 시절에서, 요즈음은 감각과 느낌이 다른 것까지 고쳐주라고 요구하는 시대가 됐고, 때론 근육이 다르게 움직이는 것도 교정 탓을 하면서 고쳐주길 요구하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술식의 발달로 많은 경우 수술을 동반하는 교정을 하므로, 40년 전에 비하면 너무나 큰 변화가 있습니다. 몇 년 전만하더라도 진단 설명을 하면 핸드폰을 가방 속에 넣고 녹음했지만, 요즈음은 거의 모든 환자분들이 핸드폰을 table 위에 올려놓고 녹음을 하는 시대로 변했습니다. 의견의 불일치가 있을 시는 언제든지 녹음된 것을 말하면서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치료에 감사하던 시대에서 내가 이 치과에서 치료를 받아주고 있다는 시대로
만 14세 미만은 형사상 미성년자이다. 이는 비비탄총을 들고 포X몬과 유X왕카드를 강탈하는 무장강도짓을 해도 형법으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몸이 약해서 유X왕카드를 빼앗는 쪽보다는 빼앗기는 쪽이었기 때문에 만 14세가 넘어서 무장강도 행위가 금지된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더 늘어났다. 기숙사 고등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생활에서 부모님의 잔소리가 많이 줄었다. 집에 들어오지 않고 학교에 있으니 부모님은 내 생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그만큼 내 행동반경에 자유가 생겼다. 저녁시간에 몰래 외출을 해서 삼겹살을 먹고 들어와도 집에 있는 부모님은 알 도리가 없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19세에서 20세가 되었을 때였다. 나는 담배는 안 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술집도 갈 수 있고, 새벽까지 PC방이나 노래방에서 놀 수 있으며, 운전면허도 딸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라는 울타리는 날 지켜주기도 했지만 가둬두기도 했고,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니 시간적 여유가 훨씬 많이 생겼다. 덕분에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이때 처음 해봤다. 때문에 나는 나이 먹는 일이 싫지 않다. 나이를 먹을수록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비대면의 시기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는 ‘선택적 비대면’의 좋은 점을 알아버렸다. 또한 진료에 바빠 모르는 사이에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어느새 우리 주위에는 ‘인공지능(전자챠트, 구강스캐너 등)’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로 들어와 있다. 최근 소개된 챗 GPT는 인간과 거의 흡사하도록 놀라운 창작 능력까지 보이고 있어 앞으로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걱정스런 예상도 한다. 편한 것에 익숙해지면 절대 불편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고 카톡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문자로 소통하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끼며 직접 통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전화 공포증’이란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들끼리도 마주 앉아서 얼굴이 아닌 휴대폰을 보며 소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요즘 세대의 당연한 모습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보화 시대의 편리함과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사람다움’을 점차 잃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 철학과 김기현 교수는 특강
본과 1학년, 아무리 해부학이 무시무시하다고는 하지만,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놀러 다니곤 했다. 실습으로 꽉 차 있는 본과 2학년 때는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하에 음주를 즐기곤 했다. 폴리클과 원내생으로 슬슬 임상에 가까워졌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던 건지 나한테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병원 제도와 방식들이 불만족스러워 최대한 학교 밖에 있었다. 그렇게 몸은 학교에 마음은 저 먼 구름 위 어딘 가에 두며 본과 생활을 지내다 보니, 어느새 수련을 받을지 혹은 본교에 남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본과 4학년이 됐다. 인생은 진지함에 약간의 유머를 더하는 것일 뿐. 농담이 반이나 섞인 농담 반 진담 반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앞으로의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때마다 머리가 무거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머리가 아픈 김에 왜 이곳에 지원하게 됐는지, 초심은 어땠는지 두 눈을 감고 한 번 돌아봤다. “구강악안면외과를 전공해서 턱관절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사실 치과에는 어떤 과들이 있고, 각 과가 어떤 환자들을 보는지 몰랐다. 1년 동안 채 썰어진 사과만 먹을 수 있었던 고등학생의 나를 구원해 준 치과 원장님이 구강
치과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 다. 평소와 같이 체어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아~라고, 이야기하는데 뒤에서 다른 선생님이 아~라고 따라 하는 것이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워 행동이 정지되었다. 나는 무슨 상황인가? 싶었고, 의아한 표정으로 “왜요?”라고 물었다. “선생님 아~는 뭔가 상냥하게 아~하는 것이 끝음을 끌듯 올려요!”라고 했다. 나의 말에 물결이 보인다는 반응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J씨가 문득 생각이 났다. 작년 여름이었다. 오후 진료의 중반을 지나고 있을 때쯤 내게 온 환자는 J씨였다. J씨는 오빠의 손에 이끌려 치과에 오는 정신발달이 조금 느린 지적 장애인이었다. J씨 나이는 나보다 언니였지만, 목소리는 아이처럼 맑았다. 그날 난 처음으로 J씨를 담당하게 되었다. 위 어금니가 없는 J씨는 무엇보다 식사를 힘들어했고, 임플란트를 하기로 계획했다. 임플란트 식립부터 치료의 긴 시간을 견뎌 본을 뜨는 인상(impression) 단계까지 올 수 있었다. J씨는 인상 전 구강을 점검하러 온 원장님의 인사에 체어에 누워 있는 채로 원장님께 맑게 인사했다. 원장님이 “어땠어요?”라고 물었다. J씨는 “아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랬다! J씨는 치료받을 때
치과의사로서 살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난관에 대해 좌절하지 않으려면 모든 비극적인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를 최대한 넓고 깊게 깔아 두는 게 현명하다. 갑자기 초진상 환자가 치과에 드러누워 분신 소동을 벌이더라도, 믿었던 수납직원이 수억을 횡령하고 잠적하더라도, 치과의사라면 언제나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깨닫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갑작스러운 비극 앞에서 좌절 없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지혜다. 세네카를 비롯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비극적 상황이라는 것을 마치 자연재해처럼 아무런 의도나 감정 없이 내 앞에 닥치는 것으로 보았다. 거기엔 아무런 명분도 원한도 없으며, 상대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걸 맞이하는 개인 역시 그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 돌발적인 상황에 정념이 이끌리는 것은, 좌절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특히 스스로 정의롭고 선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개인에게는 더욱 큰 분노를 유발한다. 그러나 애초에 비극은 상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마치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고 땅에서 지진이 발생하듯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 ‘나는 선하고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군인 및 군인 가족 분들을 대상으로 연평도에서 봉사를 하게 되었다. 봉사 지역이 연평도라고 들었을 땐 걱정이 앞섰다. 북한의 도발이 있었던 곳이고 지금도 언제 포격전이 벌어질지 모르다 보니 조금 무서웠다. 약간의 두려운 마음을 갖고 봉사에 참여하시는 분들과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연평도로 향했다. 연평도 군대 내에는 치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었지만, 치료가 필요한 군인은 많으나 의료인의 수가 한정적이다 보니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한치과의사협회와 롯데웰푸드가 나서 치과 무료진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동안 ‘닥터 자일리톨 버스가 간다’ 캠페인에 11번 정도 참여했지만, 이번만큼 환자 수가 많은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치과 이동 버스에서 하루에 30~40명의 환자를 봤다면 이번 연평도 봉사에서는 60~70명 가까이 되는 환자가 예정되어 있었다. 환자 수를 듣고 놀랐지만 좋은 일에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진료를 시작했다. 첫 번째로 봤던 환자는 이를 꽉 무는 습관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때문인지 치경부 부위, 쉽게 말하면 치아의 목 부위 쪽이 대체로 파여 있었다. 그래서 치아에 바람을 불었을
생물학에서 말하는 세대(世代)는 일반적으로 한 생명체가 태어나서 생활사를 마칠 때까지의 기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회학에서 말하는 세대는 일정한 기간(약 30년)을 한 단위로 하는 연령층으로서, 이들은 공통의 체험을 토대로 해서 그들이 갖는 의식이나 풍속을 공통으로 공유하는 연령층을 가리킨다고 한다. 86년 당시에는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살과 20살 정도로 일률적인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입생들이 모였었다. 신입생 시절 수업시간에 왜 치과대학에 지원했는가에 대한 발표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중에서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러 동기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내용은, 아버지는 약사인데 자전거로 출근하시고, 2층의 치과의사는 차로 출근해서라는 답변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한바탕 웃고 지나갔지만, 92년에 졸업해서 치과의사로서 30년을 지내고 보니 정말 심오한 내용이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우리 경희치대 20회 졸업생들은 여러 면에서 감사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남들보다 다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대학의 전공을 선택했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고,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서고 보니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문득 느껴가
지난 4월 1일은 출판기념회이지만 정년식을 겸한 감사회이며 사실은 살아있을 때의 제 장례식이었습니다. 제 버킷 리스트에 “내 장례식은 살아 있을 때 한다”고 하였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신세지고 도움받은 감사한 분들만 초대해 한 끼 대접하는 감사회를 겸한 제 장례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을 때의 장례식이라하고 초대하면 누가 올까요? 그것도 4월 1일 만우절에. 감사회라고해도 사회통념상 이상하고, 그런데 마침 책이 출간된 것입니다. 평생 제가 개발한 수술법만을 넘버링해서 총 망라한, 꼭 써야할 책이 발간된 것입니다. 책 출판기념회로 명분을 삼게된 것입니다. 서울대 교수라고 제 함량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또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았던 지인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는데 코로나로 작년에 바이러스에 삼진 아웃 당하고, 코로나·안면마비·대상포진 평생 연이어 두 번 응급실을 거쳐 무영등 수술대 위에 누워보니 감사하다는 감사회를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책도 완성되고 그래서 날을 잡았는데 제 문하생들이 “대학교실과 동문들과의 정년식도 해야하지 않겠냐”고 하였으나 조졸한 장례식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행사는 제게 의미가 있는, 제가 건립한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