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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7번째 이야기
아버지의 유산

관리자 기자  2000.03.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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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그냥 별로 없다고 대답한다. 인터넷을 통해 아마존에서 주문하여 막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 미국 소설을 읽는 것도 취미일 수 있지만, 책 읽는 것이 취미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것 같고, 그래도 뭔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고전음악을 듣는 것인데, 중학교 때부터 듣기 시작한 것이 지금도 그 열정은 식지 않은 듯하다. 사실 어렸을 때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팝송도 듣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무언의 압력(?) 때문에 집에서 그런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다닐 때였는데 그 당시에 흔히 유행하던 팝송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밤중에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나서 아버지가 내 방으로 들어 오셨었나 보다. 내가 듣던 라디오를 끄시면서 아버지가 혼자말로 하시는 말을 잠결에 들었다. “녀석, 이런 음악을 들어!” 아버지는 칠순을 넘기신 지금도 그렇지만 고전 음악의 ‘매니아’이셨다. 그런 분이 집에서 흔히 유행하던 대중음악이 집안에서 들리는 것이 싫으셨던 모양이다. 그 후로 나는 팝송이나 가요 같은 것, 아니 음악은 아예 듣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알아서 기었던거였다.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고전음악은 졸립기만 했고 너무나 나와는 먼 음악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인가, 방학이었는데 그 날은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었는데 식구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고, 나 혼자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거실 테이블에는 며칠 전 아버지가 사오신 고전음악 카세트가 하나 놓여 있었다. 무심코 집어들어 보니 ‘모짜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4번과 5번’이었다. 갑자기 이런 고전음악도 뭔가 좋은 구석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듣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세트 플레이어에 그 곡을 집어넣고 듣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주 듣기 쉬운 곡이지만 그 때는 아무 멜로디도 안 잡히고, 그 음악을 작곡한 의도도 모르겠고, 한마디로 뒤죽박죽하게 들렸다. 그 날 따라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셔서 같은 곡을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렇게 엉켜진 실과 같이 시끄럽게만 들리던 곡에서 멜로디가 하나씩 잡히기 시작했다. 그것도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칠맛까지 동반하면서. 고전음악에도 무언가 흥미로운 면이 있다는 것을 느낀 나는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음반을 하나씩 마스터(?)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처음 손에 잡힌 곡이 모짜르트와 같이 듣기 쉬운 곡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처음 들은 곡이 ‘브르크너의 교향곡’과 같이 어려운 것이었다면 아예 듣기를 포기했을지 모른다. 나는 아버지에게 여쭈어 가며 고전음악을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음악 순서대로 차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전음악은 워낙 장르도 많고, 작곡가, 곡도 많아 아무리 들어도 끝이 없는 동굴을 탐험하는 느낌이다. 요즘은 오페라에 심취하여 많이 듣고 있는데, 전에는 화면 없이 듣기 때문에 가사 내용을 몰라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거의 듣지 않았었다. 지금은 DVD로 오페라가 자막까지 붙어서 판매되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그 동안 밀렸던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고전파 작곡가의 오페라부터 듣기 시작하고 있다. 15살 때부터 갖기 시작한 취미를 마흔이 넘은 나이까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 큰 정열을 갖고 지속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전음악은 놀라운 매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고, 사는데 있어서도 많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 같다. 앞으로 나의 계획이 있다면 독일의 바이로이트에서 열리는 바그너의 축제에서 ‘악극, 니베룽겐의 반지’를 보러 가는 것인데, 앞으로 몇 년간의 표가 항상 매진이고, 그 값도 워낙 비싸서 언제나 보게될지는 모르겠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고전음악을 틀어주는 요즘은 정말 천연기념물과 같은 허름한 호프집이 있는데, 가끔씩 아버지와 한 잔하러 가곤 한다. 술에 음악까지 좋으니 부자가 그날은 술에 젖어 들어오기 일쑤지만, 그래도 나이 많으신 아버지와 그리 젊지도 않은 아들이 같이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은 것 같다. 요즘은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셔서 내가 사놓은 CD를 빌려 가신다. 그래서 나는 바쁠 때에도 일부러 음반을 몇 개씩 사놓곤 하는데, 이제는 내가 아버지가 들어보지 않은 곡도 많이 알고 있어 가끔씩 무슨 곡이냐고 물어 보시기도 한다. 그럴 때면 중학교 1학년 때의 생각이 나서 왠지 모를 작은 쾌감을 느끼곤 한다. 이렇게 평생 삶의 윤택함과 위안, 그리고 행복함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취미는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며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홍찬 / 서울중구 나홍찬 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