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의 삶 양식 지역문화 중요
“지역민 자긍심·개성등 녹아있어”
서구 열강들의 동양 진출에 따른 일제의 한반도 강점, 그리고 해방과 6·25 동란을 거쳐, 근대화와 산업화의 와중에 군사독재를 경험하고 그후 2∼3번의 정권 교체를 이루면서 점차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한국 근·현대 사회 변화의 개략이다.
이제까지 시대 흐름의 파고를 보면 앞으로의 시대적 화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나 ‘민주화를 위하여’란 구호보다는 아마 ‘지역문화 활성화’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세계화 시대에 왜 하필이면 지역이 중요하고 더군다나 지역문화가 중요할까?
지구가 하루 생활권이 되고 또 인터넷을 통하여 전세계의 정보가 순식간에 우리 앞에서 처리되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에도, 한편에선 여전히 고등학교 동창회와 운동회가 열리고 김씨네 아들이 면 서기로 가게 된 것까지 동네의 얘기 거리가 되는 것이 우리 삶의 실상이다.
다시 말해 한편에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표준대로 인터넷 정보화가 이루어지고 달러로 무역거래가 이루어지며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삶이 펼쳐지는 것에 반하여, 또 한편에서는 땅에 발을 딛고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태생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매일 매일 지역이란 공간에서 서로 부딪히며 지역적 삶을 펼치게 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지역이 중요하기 때문에 국가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세워진 국가에 더 심화해야 할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이 중요하다. 좀 더 발전적인 국가를 위하여 시민 사회가 우리의 화두가 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이미 마련된 기본적인 민주주의를 더 심화시키기 위해 이제 지역이 화두가 된 것이다.
우주를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우주에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생각과 삶은 다른 것이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지역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역과 문화는 중요한 것이다. 인간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영원한 숙명이기도 한 지역적 삶의 총화가 바로 지역 문화이기 때문에, 지구촌에 살고 있다는 현 시대의 우리에게는 세계 교회와 같은 종교적 강령보다는 오히려 민초들의 삶의 양식인 지역 문화가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각 지역이나 민족의 다양한 삶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도 놓칠 수 없었던 보편적 가치였듯이, 마찬가지로 한 국가 내에서도 중앙에 의한 문화적 획일화가 아니라 각 지역의 다양하고 고유한 문화의 정초가 놓칠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왜냐하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자긍심이나 개성이나 인간적 가치는 항상 지역 문화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는 제각기 특성이 있다. 인천 하면 항만과 공단과 자유공원이 떠오르고, 광주 하면 예향과 민주화운동이 떠오른다. 대구는 분지와 사과와 정치적 메카라는 이미지를, 속초는 오징어와 동해 바다라는 이미지를 산출한다. 이렇게 각 지역은 나름대로 자연·지리적 특성과 역사·문화적 특성을 가지며, 게다가 지역민들이 이것을 자랑하며 자신감을 가질 때 지역 사람들은 살맛이 나게 되는 것이다.
강남에 가면 사업하기가 좋고 학군이 좋다고 하여, 우리 모두 다 강남으로 가서 살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강남의 문화만을 모두의 잣대로 삼아서야 국가가 제대로 되겠는가?
국가의 총체적인 발전이란 당연히 지역의 특성화된 발전에서 비롯되며, 이것이 바로 지역의 균형적 발전이다. 그렇다면 대도시로의 집중이 가져오는 교통과 환경과 교육문제 등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지역의 특성화는 바로 지역민들의 개성과 지역 사회의 분위기로 이어져서, 결국 지역민들의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지역문화의 활성화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지역의 문화적 활성화는 한 국가의 총체적인 발전으로 수렴될 것이다.
다행히 새 정부에서도 이제 지역분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분권의 궁극적 목표가 지역문화 활성화, 즉 지역적 삶의 고양에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역적인 삶의 존중, 바로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최고의 지향 목표인데, 그것은 바로 지역문화가 활짝 꽃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부가 지역분권을 말하면서도 혹시 문화가 궁극적 지향점이 아니고 행정이나 경제 부문에 그친다면, 지역분권은 예전처럼 그룹이나 계층이나 지역간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끝나 결국 개혁과 사회안정은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지역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은 풍요로운 지역문화의 토대 아래에서만 가능하며, 우리가 지역분권을 통해 바라는 진정한 지역자치의 궁극적 목표도 바로 문화적으로 풍성하고 안정된 사회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