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정신으로
1980년 5월 당시 50대 중반인 김 선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리 병원으로 뛰어오셨다.
길을 지나가는데 공수단이 무조건 붙잡아 곤봉으로 후려치더라는 것이다. 변명이나 항의를
할 사이도 없이 일격을 당하고 보니 정신 없이 달아나 우리 병원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김 선배님은 평소 국가관이 뚜렷하시고 그 공로로 훈장까지 받으신 분이다. 그런데
공수단들은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같이 한참동안 분노의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탕,탕,탕 …
금남로에서는 시민을 향하여 M16 소총의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도저히
병원만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요셉형 집으로 뛰어갔다. 요셉형은 우리 교회의 전
신도회장이었고, 의협심이 강한 분이어서 나와는 매사에 의기투합이 잘 되는 분이다. 우리는
본당 천주교회로 달려갔다. 교인들은 교회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서 불안한 표정으로
사태추이에 대하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신도회 부회장이었던 필자는 신도들을 향하여
일갈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교우여러분! 지금 금남로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실천하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부르시면 나가 순교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바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의 육체와 영혼은 하느님께 맡기고 있었다. 선량한 우리 교우들은 이의없이 모두
따라주었다. 주교님을 비롯하여 각 교회에 전화를 걸어 광주시내에 계시는 모든 신부님들은
우리 교회로 모이시도록 했다. 몇 교우들은 플래카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들고 나갈 플래카드 문자를 생각나는 대로 불러주었다. 삽시간에 동조하는
교우들은 몇백명으로 늘어났다.
기다리던 신부님들은 오시지 않았고 우리 본당 신부님은 출타중이어서 본당 수녀님만 모시고
금남로로 달려나갔다 .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양민을 살상하지 마라" 구호를 외치며 밀물처럼 금남로로 향해
전진했다. 군인들은 시민에게 총질을 했으며 수많은 인파는 그 총알의 위력에 눌려 뒤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우리 본당 데모대열은 뒤로 밀리는 시민에게 다시 밀려 흩어지고 만다.
전화를 받은 각 본당의 신부님들은 우리교회로 오는 길이 차단되어 오지 못하고 남동
성당으로 집결해서 시민을 구출하는 활동을 하기로 결의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여파로 몇분의 신부님은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으나 카톨릭이 이 나라를
민주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부정 못할 역사적인 사실이 아닐수
없다.
5·18과 광주시 치과의사회
5·18! 광주시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진상에 대하여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 지성인의
집단이라고 자칭하는 우리 치과의사들은 무엇을 했을 것인가? 우리 후배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 당시 광주시치과의사회 학술이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필자는 우리도
무엇인가 시민편에서 일익을 담당해야 되겠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광주시치과의사회
임원들의 동의하에 시민군이 광주시내를 장악한 어느날 우리 임원 8명은 도청 입구를 지키고
있던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치과의사들이고 무엇인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왔으니 책임자와 만날 수 있게
해달라"
그러나 그들은 나이든 사람들은 도청 안으로 들여 보낼 수 없다고 정중히 우리를 거부했다.
우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뿔뿔이 헤어졌다. 우리가 무엇을 해냈다는 것보다도
행동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증언해둔다.
폭거와 의거>
5·18 이후 광주사태를 폭동, 폭거로 지칭하였으며 그에 연루된 많은 시민들이 투옥되었고
시민들의 정서는 분노로 이어져갔다. 1주년이 되는 1981년 5월 18일이 되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전국 시, 도 평신도 회장단 회의가 ‘광주 피정의 집’에서 열리고
있었다. 상처받은 광주시민들을 위로한다는 차원에서 광주에 모인 것이다. 필자는 5·18 이후
호남동 천주교회의 신도회장이 되었고 광주대교구 평신도연합회 부회장에 피선되었기 때문에
전국 회장단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천주교측은 반민주 세력에 대한 항거에 앞장서 왔고 이 회장단 회의에서 정국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성명서가 발표될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긴장의 순간이기도 했다.
회의상 외곽에는 사복경관들이 우리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기대했던 것보다 회의장은 훨씬 유연한 분위기였고 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