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ing Field에서 Healing Field로
우리는 흔히 6·25전쟁을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합니다. 이념의 차이 때문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민족끼리 서로 총대를 맞대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 그래도 우리는 그
당시 이념으로 구별된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특정한 이유없이
같은 피를 나눈 많은 형제, 자매들을 무참히 학살한 현장에 가 보았습니다. 차마
서방세계에서도 믿으려하지 않았던 그런 일들이 7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말까지
「캄보디아」라는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농민을 위한 혁명이라며 점령하는 도시마다 모든 시민을 시골로 내쫓고 모든 학교와 병원의
문을 닫아 아비규환 상태로 굶주림과 전염병에 수십만명이 죽은 것도 모자라 단지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또는 그들의 가족이라고 1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포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 정권하에서 처참하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23살의 포르포트는 10대 초반의
혁명군사들을 동원하여 심지어는 그들의 부모까지 정탐하게 하여 그들 스스로 부모를
죽이게끔 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단지 공부를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비닐
봉지를 얼굴에 뒤집어 씌워 사람들을 죽이던 영화 「Killing Field」의 장면들이 다시
떠오르는 곳이었습니다.
이성을 잃은 20대 초반의 군 지휘관이 한 불교사원에 머물며 그곳에서 20만명을 죽인 죽음의
골짜기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골과 뼈들로 가득했었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칼을
가는데 쓰였던 골짜기 옆 사원의 사자상의 엉덩이는 반질반질 닳아 없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크메르루즈 내부에서도 정권쟁취를 위해 함께 싸운 베트남파가 중국파를 프놈펜에 있는 한
학교를 개조한 형무소에서 2만명을 고문하여 죽였습니다.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어떻게
고문했는지 일일이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긴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위가
상했습니다. 핏자국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그곳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과거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에도 캄보디아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지식층이 말살된 사회는 회복능력이 상실되었고 만연한 부정부패로 인해 좀처럼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9살, 10살 되는 여자아이들이 납치되어 프놈펜
사창가에 팔리고 도덕과 기존 가치관이 무너진 사회라서 그런지 아시아에서는 최대로 높은
인구의 25%정도가 AIDS보균자로 추정되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가난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한 곳에서도 「Killing Field」를 「Healing Field」 로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애쓰는 한국인 선교사님들이 계신 것을 보고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이런 위험한 곳에 와 이곳에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시골에서
고아원을 하시는 분, 이 민족을 위해 지뢰밭도 마다않고 다니시며 마을마다 우물을 뚫어주고
학교도 세우시는 분,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국적도 바꾸시고 이일 하시느라
말라리아와 뎅기열을 수없이 앓으신 그런 분을 뵐 때 저는 참으로 머리가 숙여지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런 곳에 정말 미약하나마 저희들이 가진 기술로
그들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축복된 일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속한 팀은 다락방전도협회와 연대 치대 소속인 「에쎌」이라는 진료팀으로 연대치대
백형선 교수님을 단장으로 매년 여름에 한 차례씩 해외진료를 나갑니다. 그동안 필리핀,
중국, 보르네오섬,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인도, 아제르바이잔에 이어 금년이 8년째로
수련의들과 본과 4학년 원내생들을 주축으로 23명이 캄보디아에 일주일간 다녀왔습니다.
진료한 곳은 프놈펜에서 2~3시간 떨어진 깜퐁참이란 메콩강을 낀 작은 도시와 그곳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되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진료를 하였습니다.
오후에 비행기가 도착하여 저녁에 깜퐁참으로 가는 차에서 무장테러를 당할까봐 등을 끄고
조심해서 가슴을 졸이며 길을 달리던 것과 여러가지로 좋지 않은 여건이었는데도 한센병
마을에서 진료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인상에 남습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그곳에서조차
격리된 마을이었지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하루에 1백명이
넘는 아이들을 포함하여 2백명 정도 그곳에서 치료했습니다. 비록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리고 맨발에 때에 찌든 누더기 옷을 거치고 있었던 아이들이지만 천진난만한 그들의
모습은 아직도 제게 미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코가 내려앉은 분이 치료를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