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후된 치과수준 계속 도와야”
입국 절차 복잡 진료 하루 연기
신경치료·크라운 개념도 없어
새벽까지 졸린 눈으로 의치 제작
몽골이라는 곳을 생각하면 드넓은 초원과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대지가 막연히
떠오른다. 그 외에는 어떤 곳인지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단지 학생으로서 마지막
여름방학을 의미있게 보내고 싶어서 의료봉사단에 선뜻 자원하게 되었다.
몽골은 ‘칭기스카한의 나라"로 상징되고 칭기스카한은 전 인류사에서 중국을 내포하는
‘동북아시아의 얼굴"이다. 흔히 몽골 사회를 가리켜 13세기와 20세기가 공존하는 나라라고
한다. 전통에 대한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조차도 아직 이동식
가옥인 ‘게르"에 사는 시민이 더 많다.
그러나 소련으로 인해 사회주의 국가가 된지 70여년이 넘어가면서 모든 문화가 소련식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현재는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되고 있는 과도기에 놓여 있지만, 도시
곳곳에서 현재와 과거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바얀트우카 국제공항 주변을 둘러보니 주유소
옆을 유유히 지나가는 소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의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집 들이
늘어서 있는 것은 한국의 5, 60년대 시절과 유사했다.
조인호 학장님을 팀장으로 하여 단대치대 여러 교수님들과 수련의 선생님들, 선배님 그리고
학생으로 구성된 우리팀은 준비과정부터 힘을 모아야 했다.
치과병원내 각 과와 여름 의료봉사 동아리가 협력하여 기구를 준비했고 그 밖에 여러 곳에서
물품을 협찬받을 수 있었다.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여러 번 짐을 싸고 풀며 점검했다.
공항의 절차가 엄격하고 복잡하여 짐은 도착 당일날 찾을 수 없었고 다음 날도 짐을 찾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나절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과연 진료를 할 수는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머나먼 곳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결국
둘째날도 짐을 찾지 못해서 우리는 전체 진료 스케줄을 하루 연기해야만 했다.
세째날부터 3팀으로 나누어 진료가 시작되었다. A팀은 몽골 국립대학내 보건소, B팀은
제1지구 보건소, C팀은 바얀주쿠흐지역 병원에서 진료를 하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몽골대학 한국어과 학생들이 통역을 맡아서 도와주었다. 현지
치과의사분들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
몽골의 치과치료 수준은 생각보다 낙후되어 있었다. 신경치료의 개념도 없고, crown의
개념도 없었다. 오직 치아가 상하면 발치를 하고 임시의치를 만들어 넣는 것이 전부였다.
20대 아리따운 여자가 진료를 받기 위해 앉더니 입안에서 여러개의 작은 의치들을 빼는
것이다. 그나마 의치도 경제적 여건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대부분은 발치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치주과, 소아치과, 보철과, 보존과, 구강외과 각각의 전문적 파트를 나누어 진료했다.
abscess가 생겨서 온 어린이를 치료해 주고, 다음날 좋아진 상태로 다시 만났을때 기분이
좋았다. 밀려드는 환자들로 하루종일 북새통이었지만, 교수님들과 여러 다른 팀원들이 모두
힘든 내색하지 않고 진료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진료가 끝나면 밤새 임시의치를 제작하느라 새벽녘까지 졸린 눈을 부벼야 했다. 매일매일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진료를 하기 위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교수님들이 준비하신 슬라이드를 보며 몽골 치과의사들은 많은 질문을 하였다. 세미나를
통해 새로운 치료의 세계를 보기를 기대했다.
몽골의 낙후되어 있는 치과수준이 우리의 작은 도움을 시작으로 한발자욱씩 발전하기를
바란다.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되면서 몽골의 치과계에도 혁신적인 치료법이
소개되고 더 나은 치과진료를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탓에 모두 감기에 걸려 고생했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타국에서 진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는 점이 오히려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