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설득 총기 수거
희생 크게 줄여
고초 겪었지만
후회는 없어
1·9·8·0 년 광주의 5월 하늘은 요즈음 날씨처럼 화창했으리라. 매년 5월이 되면 그날의 아픈 기억과 상처들이 파노라마 같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당시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한복판에 서있던 젊은 대학생이 지금은 어엿한 치과의사로 성장했다. 金升憲(김승헌) 신성치과병원장. 그는 “21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 때 아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金병원장은 5·18 당시 전남대 화학과 2학년에 재학중 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밀려오는 공포를 억누르고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 나선 그는 당시 장례위원회 부위원장과 학생대표로 수습대책위원회 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더 많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위해 당장은 비참하더라도 신군부와 타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민들을 설득, 총기를 반납하도록 앞장섰다. 대책위원회를 대표해 “…우리가 당장 한발짝 물러난다고해서 결코 패배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연히 일어난 이 5월을 기억하는한 민주주의는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라는 유인물을 밤을 세워 작성, 시민들을 설득해냈다. 이같은 노력으로 많은 수의 총기가 반납될 수 있었고 더 많은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진압군이 도청을 향해 진압해 들어오는 마지막날에도 긴긴밤을 그곳에서 보냈다.
사태가 수습된 이후 군복무를 조건으로 살아남아 ‘불순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갖은 고초를 겪으며 군생활을 마친 그는 짧은 기간의 준비를 거쳐 1984년 원광대 치의예과에 입학 늦깎이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1990년 ‘면허번호 9660’으로 당당한 치과의사가 된 그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인만큼 항상 긴장하고 이 속에서 항상 행복감을 느낀다”며 “치과의사 이외에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金병원장은 “지금도 당시 용기를 갖고 정의롭게 나섰던 행동에 대해 후회없다”며 “서로 용서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지역감정도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金大中(김대중) 대통령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대통령 사람들 중 핵심적인 역할을 한 28명 중에 포함돼 곧 발간될 ‘노벨 대통령과 知人들’ 저서 집필에 참여하게될 그는 현재 사람에 대한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펼치고 싶어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동참하고 있다.
죽음을 넘나드는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던 金병원장. 그는 ‘평화’라는 단어를 가슴에 담고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대학을 설립하려는 꿈과 아직 미개척 분야인 재료학을 연구해 국가 장래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오늘도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윤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