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우즈벡서 선교사활동 시작
카자흐스탄서 대규모 집회 열기도
“평생 복음활동 펼칠 터” 다짐
“죽은 시체나 산 사람에게서 거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또 산 사람이 언제가는 저렇게 된다는 생각에 세상에서 불변하는 것을 찾고자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서역(西域)이라 불리던 지역은 중국 사람들이 한나라 때부터 중국 서부지역인 신장 지방 일대를 일컫는 명칭이다. 이곳에 8세기부터 무슬림들이 들어와 살던 중앙아시아 지역에 칭기스칸이 들어와 나라들을 건국했다.
그중 킵차크 칸국이라 불리던 투르크계 및 몽골 유목민 집단을 우즈벡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20세기초 러시아가 침입해 지배에 들어갔다가 1991년 러시아 연방이 해체되자 중앙아시아 국가중 가장 먼저 독립선언을 하게됐다.
이것이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이며, 고난의 땅 아프가니스탄 위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도 국민들의 대다수가 무슬림이다. 러시아가 통치하면서 그리스 정교회를 심어보려고 무던히도 애써왔었지만 온갖 박해를 참아가면서 지켜온 것이 무슬림, 즉 이슬람 신앙이다.
이곳에서 기독 신앙의 선교 활동이 발각될 경우 선교사는 즉각 추방되고 성경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주민은 이슬람 전통인 가족묘에 묻힐 권한과 취업의 기회가 박탈되기 때문에 선교의 구체적인 위치나 선교자의 신분이 밝혀져서는 안된다. 위험을 무릅쓰고 머나먼 이국 땅, 그것도 이슬람 국가에서 이같은 자칭 ‘게릴라식’ 선교활동을 펴오고 있는 한국인이 있다.
치과의료 선교회 소속 김동희 선교사는 본과 1학년때 예수를 영접하고 해부학 시간에 시체를 보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자신의 삶을 남을 위해 바치기로 했다고 한다.
김 선교사는 85년에 서울치대를 졸업하고 87년부터 90년까지 군 생활후 91년부터 우즈베키스탄에서 선교사 생활을 해오다가 최근 사역을 마치고 귀국해 한국에 잠시 거쳐하고 있다.
당시에 외국, 그것도 공산권이었던 나라에 선교활동을 하러 간다고 하자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특히 김 선교사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반대가 더욱 심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가출까지 해서 자신의 뜻을 내보였다고 한다.
김 선교사가 우즈벡에 처음 가서 한일은 그곳의 문화를 이해하고 언어를 배우고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수도인 타슈켄트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중동이나 아랍의 언어는 이해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워 아랍 기독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아랍 이슬람교도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같은 아랍어지만 사용법이 상이하다고 한다.
같은 단어라도 의미가 서로 달라 아랍교회에서 사역할 사람은 아랍 기독인들이 익숙한 언어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보통 선교사들이 언어 익히는 데만 4~5년이 걸린다며, 아랍어는 처음 2~3년 안에 배우는 ‘생활아랍어’와 그 뒤에 익히는 2~3년간의 ‘사역의 언어’로 나뉜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지하교회를 설립하고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선교활동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사회사업을 병행하면서 거점을 만들어 나갔는데, 현지에서는 사회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했다고 한다. 우즈벡 국립치과대학에 아시아문화개발협력기구를 만들어 치대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는데, 현지 학생들은 장학금 수상을 큰 영광으로 여기는 등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10년여 넘는 세월을 겉으로는 사회사업가처럼 활동하면서 내면으로는 교회를 설립하고 기독교인들을 돕던 김 선교사는 2000년에 우즈벡 옆 국가이면서 기독교인에게 비교적 관대한 카자흐스탄에서 크리스찬 3만명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것을 김 선교사가 10여년 넘게 사역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일 중 하나로 꼽고 있다.
10년여 우즈벡 사역을 마치고 지금은 국내에 들어와 파키스탄 등에 단기로 선교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새로운 선교 프로그램을 배우면서 지내지만 역시 바쁜 생활에 있다.
김 선교사는 단기 계획으로 4~5년 페르시안 벨리(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이란, 이라크 등)에 사역을 하고, 일할 수 있는 나이의 한계점으로 20년인 60세까지 잡고 중동지역에 복음화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한다.
우즈벡이 지내기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향수병은 없다”고 단호하게 답하고 오히려 기반이 없는 한국이 불편하다고 한다.
또한 기자가 보기에는 김 선교사도 대단하지만 우즈벡에 같이 가서 세아이를 키운 부인(송재인)도 대단해 보였다. 서울대 가정관리학과를 나온 재원으로 김 선교사가 서울치대에서 수련의일 때 만났다.
우즈벡에서 남편 뒷바라지도 하고 세아이를 국제학교에 보내면서 한국 학생들의 진도와 똑같은 공부를 시키는 것도 부인 몫이었다.
또한 지금 중학생인 아들이 선교에 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