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경기와 영글어간 청춘활력
국가대표선수로도 맹활약 펼쳐
협동심·책임감 함양 ‘신사 스포츠’예찬
한국에서 두번째로 국제심판되기도
하나의 염원모여
모두의 힘을 모아
우리는 전진할뿐
마라톤에 버금갈 정도로 힘든 스포츠. 정식 코스인 2km를 전력으로 노를 저어 가는 선수는 한번 레이스로 1.5kg정도의 체중이 줄어든다는 스포츠. 이 스포츠는 바로 조정이다.
조정으로 오랜 스포츠 외교 활동을 해온 이원철 원장.
이 원장은 서울치대 조정부인 구륙회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는 사단법인 대한조정협회 이사, 조정국제심판, 대한체육회 의무분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원장은 83년부터 조정 관련 국제회의에서 한국회 대표로 참석했다.
조정세계연맹 총회, 아시아조정연맹 총회 등 국제적인 행사에 참석하면서 한국회 대표로 오랜 스포츠 외교를 해온 것이다.
88올림픽 때에도 조정경기를 준비하는데 실무를 담당했다.
이 원장이 조정국제심판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86년도의 일이다. 현재 조정국제심판은 국내에 모두 6명.
86년도 서울아시안게임 때 조정국제심판을 봤으며 87년에는 인도네시아 동아시안게임과 중국 상해의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88년에는 한국올림픽 등 각종 아시안게임이나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국제심판으로 활약했다.
최근에는 2000년 크로아티아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조정국제심판을 봤다.
현재 개최되고 있는 부산아시안게임 조정경기에서도 국제심판이라는 그의 몫을 해내고 있다.
이 원장의 청춘은 조정과 함께 영글어갔다.
조정을 시작한 것은 63년.
이 원장이 64년 서울치대 조정부인 구륙회 2기 주장으로 있었을 때의 에피소드 한 가지.
그해 8월 한강에서 전국체전 겸 전국선수권대회가 있었는데 서울치대가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선수들은 기쁨을 감출 수 없어 축배를 들고 싶었지만 당시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이 뻔한(?) 일이라 기분을 낼 만한 곳이나 자금이 없어서 이 원장이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술집 주인의 호의로 우승기를 담보하고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만취가 돼 즐겁고도 유쾌한 파티를 즐겼던 것.
다음날 총장에게 우승기가 전달돼야 하지만 우승기는 술값 대신 맡겨진 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자비로운(?) 지도교수 덕분으로 외상값을 청산하고 우승기를 되찾았던 일이 있었다.
이 원장의 조정 실력은 탁월했다.
66년에는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대 성적유지를 위해 조정을 더 이상 액티브하게 하기는 힘들었다.
이후 이 원장은 해군사관학교에서 조정부 코치를 맡게 됐다.
2년간 해군 조정부를 코치하면서 국내 대회에 출전하기만 하면 1등은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원장의 실력을 인정한 당시 해군참모총장은 조정부를 이끌고 일본에 가서 일본팀을 꺾으라고 명령했지만 학업 때문에 이룰 수는 없었다.
이 원장은 73년 졸업하면서부터 사단법인 대한조정협회 지도위원으로 활약했으며 70년대 말에 재무이사를 역임한 이후 계속 협회와 관계를 맺고 있다.
협회에서 시설이사, 국제이사,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는 심판이사이다.
현재의 미사리 조정경기장은 이 원장이 협회의 시설이사를 맡고 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조정경기장의 장소선정에서부터 공사가 끝날 때까지 이 원장은 많은 공을 들였다.
경기장을 짓기 위해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독일 파견에 직접 나서서 독일의 조정경기장 시설을 모두 조사하고 국제경기를 어떻게 운영해 나가는지에 대한 감각도 익혔다.
“조정은 서구에서는 로열 스포츠로 통합니다. 서구에서 조정을 했다면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대학에서 조정부로 활동했다면 취업이 100% 보장될 정도입니다.”
이것이 이 원장이 소개하는 조정이란 스포츠의 한 단면이다.
이 원장이 많은 운동경기 중에서도 조정을 선택한 이유는 조정의 신사성(?) 때문이라고 한다.
몸을 많이 부딪히는 운동경기일수록 반칙을 많이 하기 마련. 그러나 조정이라는 스포츠는 여러사람과 함께 단결된 힘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협동심, 책임감과 같은 사회성의 함양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이 원장은 치과의사들에게 조정을 권하지는 않는다.
조정이 워낙 격렬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동작동 국립묘지로부터 제일 한강교를 지나 철교에서 끝나는 코스로 많이 했습니다. 골인지점에 오면 너무 힘이 들었죠. 제일 한강교를 지날 때 햇빛을 본 후 그늘에 오면 한기 그 이상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철교로 향했습니다. 힘들었을 때마다 그때를 회상하면 힘이 납니다.”
이 원장은 조정국제심판이 만65세까지 할 수 있다며 앞으로도 조정국제심판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안정미기자 j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