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갑다. 그러나 난방이 잘 된 아파트에서 살고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는 요즘은 계절의 변화가 예전처럼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정서적으로 스산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쯤 창호지를 새로 바르고 문풍지를 정성스럽게 손질할 때다. 그러면서 흰 종이 사이에 예쁜 나뭇잎을 넣으면 이파리 모양에 따라 멋스런 화폭이 되었었다. 그리고 하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파란 달빛은 낭만적인 겨울밤을 연출하며 사람들을 시인으로 만들었다. 정말 오염안된 종합 예술작품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모든 것은 변했다. 보다 많이, 보다 편리하게, 보다 빠르게, 보다 화려하게, 보다 더더 하다 보니 자연은 자꾸 뒷전으로 밀려났다. 의식주의 모든 원자재가 거의 모두 인공적인 화학물질로 대치됐고, 산천은 고사하고 기후까지 바뀌었다. 그런 가운데서 인간들도 많이 망가져서 세상이 살벌해졌다.
청계천 복원사업이 신문에 오르내리던 며칠전 나는 특별한 전시회, 제불화가 방혜자씨의 ‘빛의 숨결전’을 감상했다. 특이하다는 것은 그림을 그린 모든 물감이 자연에서 즉 나무,흙,꽃,씨앗 등에서 추출하여 만든 것이었다.
유화에 비해 화사함은 덜할지 모르나 은은하게 발하는 착 가라앉은 색감은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물론 모든 예술작품은 보는 이의 마음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젊은이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년배인 내겐 느낌이 달랐다. 그 동안 화가로서 40년이상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며 그 주제 소재는 물론 화구의 원료까지 여러 가지를 시도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의 말을 빌리면 그 색감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물감을 쓴 이후 본인의 건강도 아주 좋아졌다고 한다.
性比(성비)를 마구 파괴하다 못해 복제인간까지 만들겠다고 날뛰며 의학이 아슬아슬 위험수위에까지 이른 요즘 아주 작은 일이지만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유행은 돌고돌아 패션이 복고풍으로 기울고 있다지만 지금 사람들이 먹을 것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자연주의로 환원하려는 것은 유행의 문제는 아니다.
광목대신 나일론 옷감이 대접을 받고 손때묻은 머릿장이 호마이카 장으로 바뀌며 모든 개천은 시멘트로 복개되고, 산림이 마구 파손돼 빌딩으로 뒤덮이는 과정을 우리 세대는 보고 살아왔다. 불과 오십년이 안된 세월이었다.
세계적인 추세지만 우리는 가난과 무지와 조급함이 겹쳐서 너무 자연을 급속하게 파괴한 듯 하다. 이제라도 구석구석에서 자연을 살리자는 운동이 일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특히 젊은이, 어린 학생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볼 때 대견스럽고 앞선 세대로서 부끄럽다.
눈만 뜨면 새로운 것이 발명돼 세상은 점점 좋아지는데 죽기 억울하다는 노인들도 많다. 그러나 어수룩한 시대에서 이만큼 산 것이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 그래도 우리는 마음 속에서 되감기해 볼 수 있는 추억의 산하가 있으니까.
생명연장, 질병퇴치 등의 면죄부를 받았다고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제일 앞장 서서 자연의 순리에 거역하고 조물주의 뜻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민들이 산천을 되찾고 화가는 자연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 참에 우리 치과의사들은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명제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개개인이 그런 자세로 환자들을 돌보면 현대문명이 망가뜨린 인간성이 조금씩 좋아져서 살기좋은 세상이 되리라 믿는다.